[Z인터뷰] '걸캅스' 라미란 ① 지금 이순간, 무명이 힘들 후배들에게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제 나이 마흔 다섯, 영화를 시작한지 20년이 됐는데, 이제 첫 주연을 맡았다”
배우 라미란은 지난 4월 30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강로동 CGV용산에서 열린 영화 ‘걸캅스’의 언론시사회 때 자신의 지난 배우 생활을 돌아보며, 자신의 첫 주연작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보통 박수에 인색한 언론시사회였지만 많은 박수가 나왔다. 연기 그리고 배우라는 자신의 길을 오롯히 걸어온 중년 배우에 대한 존경이자 격려였다.
라미란의 첫 주연작은 ‘걸캅스’다. ‘걸캅스’는 48시간 후 업로드가 예고된 디지털 성범죄 사건이 발생하고 경찰마저 포기한 사건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뭉친 걸크러시 콤비의 비공식 수사를 그린 작품이다. 라미란은 워킹맘이자 경력단절된 잘나가던 형사 ‘미영’을 연기했다. 극중 활약이야 평소 우리가 알고 있는, 기대하는 라미란, 딱 그런 연기를 보여줬다.
첫 주연작으로 돌아온 배우 라미란과 제니스뉴스가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주연이라는 새로운 경험과 본의 아니게 일어난 버닝썬 사태 및 젠더 논란까지, 여러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드디어 주연으로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주연으로 인터뷰도 처음인데, 달라진 마음가짐이 있을까?
‘입조심 해야겠다’ 싶다. 하하. 조연 때는 안 했다. 전혀 상관없었다. 책임감이 막중하다. 하지만 반대로 다 내려놓은 상태다. 그럼에도 부담스럽고 떨린다. 시사회 때도 ‘다 내려놨다’고 생각했는데,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이제 또 다시 내려놓은 상태다. “뭣이 중헌디”의 상태가 됐다. 다만 책임감은 가지고 있다. 결과나 거기에 따른 평가는 제가 받야야 할 몫이다. 잘 견뎌내려 한다.
현장에서도 많은 게 달랐을텐데.
단적으로 촬영 분량이 많아졌다. 그러니 촬영장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덕분에 사람들과 더 친해질 수 있었다. 조연 땐 친해지고 싶어서 촬영현장에 가고 싶은데, 일 없이 가 있기도 뭐했다. 그래서 제가 “주인공 아니어도 회차 많은 걸 불러주면 좋겠다”는 말을 많이 했다. 더 끈끈해지고 더 자주 볼 수 있었던 게 제일 좋았다.
연기적으로 다른 부분도 있었을까?
연기는 다 같은 거지만, 재미는 없었다. 힘이 더 든다. 조연할 때 좋았던 건 가성비다. 잠시 나와서 신을 훔치고 가는 게 재미있었다. 주연은 재미도 모르겠고, 마냥 혼란에 빠져있었다. 주연과 조연의 차이는 진짜 크게 없는 것 같다. 더 많은 시간 현장에 있고, 더 많은 신을 챙겨가는 것 뿐이다.
그간 조연으로 여러 선후배와 함께 했다. 주연이 됐다는 소식에 축하 인사도 많이 받았을 거 같다.
전혀 없었다. 사실 아무에게도 연락을 안 했다. 제가 참 몹쓸 후배다. 평소 안부 전화 같은 걸 잘 안 한다. 무엇보다 괜히 창피했다. 딱히 뭐라 말씀 드려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라미란의 주연인 것도 의미 있지만, 여성 주연, 그것도 짝패 영화라는 것도 의미 있다.
여성 주연의 영화는 아무래도 주목도가 낮았다. 성적에도 많이 치였다. 그래서 악순환이 계속 됐다. 만들어지지 않게 됐다. 투자에 생기는 문제도 있었다. 어찌 됐건 용기 있게 도전하신 제작해주신 제작사에 감사하다.
이런 시도는 계속 해야 한다고 본다. 단지 여성 영화라 그런 것은 아니다. 한국 영화의 다양성은 넓혀져야 한다. 작품 자체가 다양해져서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여러 모로 도전인 작품이다. 제겐 첫 주연작이고, 감독님께는 상업 영화 입봉작이다. 다른 친구들도 다 젊은 친구들로 구성됐다. 기댈 곳 없는 싸움 중이다. 고생해서 만든 영화니 좋은 성적과 함께 좋은 평가를 받았으면 싶다.
첫 액션 영화이기도 했다. 액션을 위해 준비한 게 있다면?
45세 박미영의 몸을 만들었다. 하하. 편했다. 식스팩을 만들 일도 아니었다. 우리 영화의 장점이다. 그런 가식들이 전혀 없다. 말 그대로 미영은 아줌마다. 공무원으로 하루하루 일해 먹고 사는, 열정만 넘치는 형사다. 오래 쉬었기 때문에 몸도, 일 처리도 서툴 수 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액션이 잘 나왔다. 리얼리티가 살아있는, 아줌마가 할 수 있는 액션이었다.
미영의 과거가 레슬링 선수였던 것도 마음에 들었다. 멋있는 투기가 아닌 투박한 투기다. 아마 제 체형을 생각하고 넣으신 것 같다. 여성이 할 수 있는 그림 중에서 잘 어울리는 걸 뽑으신 것 같다.
부상은 없었는지?
자잘한 타박상 외엔 없었다. 안전하게 했고, 연습도 많이 해서 위험 요소는 많이 없었던 것 같다. 액션의 80% 정도는 직접 소화했다. 하지만 타격 액션의 경우 전문가께서 훌륭하게 하시니까 맡기고 갔다. 사실 제가 날라차기도 가능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제가 하면 전 상대 배우를 진짜로 찰 수 있다. 상대방이 상할 수 있기 때문에 참은 거다.
상대방을 때릴 수 있다고 말하기엔, 대차게 맞는 신이 많다.
때리고 맞는 신이라는 것이 보통 무수한 약속 아래 이어진다. 제가 몸짓만 해도 상대방은 호로록하고 넘어간다. 저 역시 맞는 연기만 따로 연습을 했는데, 합을 맞춘다는 게 참 어렵다. 보통 맞는 거보다 때리는 게 힘들다 하는데, 전 맞는 게 더 힘들었다. 안 맞아도 맞은 척 하고 싶은데, 꼭 진짜로 때릴 거 같은 기분이 든다. 실제로 하준이와 그런 적이 있었다. 하준이가 제게 너무 미안해 했다. “선배님, 죄송해요”라면서 저를 찼다. 하하.
많은 배우들이 롤모델로 라미란을 꼽고 있다.
어느새 그렇게 됐다. 예전엔 그렇게 말하는 후배들을 걱정했다. “나보다 좋은 꽃길을 걸어라”라고 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제 길이 꽃길이었다. 잘 걸어온 것 같다. 예전엔 “롤모델로 삼지 마”라고 했다. 부담스러웠다. 더 잘하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제 쓸데없는 겸손 따위는 내려놨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제가 있는 자리에서 제 갈 길을 가면 된다고 생각한다.
영화판에 단역부터 해서 많은 조연들이 있다. 많은 이들이 '언젠가 나도 주연'을 꿈꿀 수 있다. 그들에게 조언을 해준다면?
주연, 조연, 단역, 그 차이는 분량의 차이다. 연기를 하고 있다는 큰 틀은 같다. 배우라면 누구나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을 거다. ‘주연’이라는 것이 연기의 목표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역할에 목표를 두지 않고,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서 행복과 만족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럼 더이상 바랄 게 없어진다. 부담도 없고, 스트레스도 사라진다. 이 일 자체를 즐기면서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무명 시절도 즐겨야 한다. 결국 그 시간에도 무언가 계속 쌓인다. 언젠가 꺼내 쓸 수 있는 시간이 된다. 그 상황, 그 자체를 마일리지 쌓듯이 슬픔도 외로움도 다 쟁여놨다가, 나중에 꺼내 쓰면 좋겠다.
뼈가 되고 살이 될 조언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걸 알고 있지만 경제적인 여건 때문에 많이 힘들어한다.
저 역시 금전적으로 힘든 때가 있었다. 버스비가 없어서 못 나간 적도 있다. 그래도 굶진 않았다. 제겐 비빌 언덕이 있었다. 친정도 있고, 시댁도 있었다. 제가 아이를 낳고 연기를 시작했는데, 육아도 다 도와주셨다. 만약 미영이처럼 제가 움직여야 집이 굴러가는 구조였다면, 정말 답이 없었을 거다. 그 상황에 누군가 “10년만 버텨”라고 말하면 욕이 먼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결국 버텨서 남는 놈이 이기는 거다. 포기할 것도 아닐 거니까. 저 역시 그렇게 더부살이 하면서도 즐거웠다. 자존심이 상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적립한다 생각했다. 누구한테나 기회는 온다. 다만 모르고 지나가거나 놓칠 뿐이다. 그런 희망이 없다면 사람은 살 수 없다. 그 희망을 쥐고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