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리의 1열중앙석] 비워냄으로써 채워내다, 뮤지컬 '아랑가'
[제니스뉴스=임유리 기자] 시선을 사로잡는 거창한 무대 세트는 없다.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잔잔하게 흔들리는 실 커튼과 조명, 그리고 배우들뿐이다.
실 커튼은 그 위로 투영되는 영상과 조명에 따라 일렁이는 강물도 되었다가, 마을 뒷산도 되었다가, 흩뿌려지는 피가 되기도 한다. 이는 작품에 등장하는 소품, 부채 또한 마찬가지다. 부채는 때에 따라 칼이 되기도 하고, 도미의 눈이 되기도 하고, 개로와 도미 그리고 아랑,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바닥의 조명은 극중 상황에 따라 사각형으로 등장인물들을 둘러싸면서 작품의 이해도를 높임과 동시에 긴장감을 더한다.
뮤지컬 '아랑가'는 도미설화를 바탕으로, 뮤지컬 넘버와 판소리를 극에 접목시켜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추구한 작품이다. 2015 서울뮤지컬페스티벌 예그린 앙코르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앞서 아시안 시어터 스쿨 페스티벌에서는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했고, CJ크리에이티브 마인즈 리딩작으로 선정되는 등 ‘아랑가’는 정식 공연 개막 전부터 화제를 불러 모았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도미설화와 고구려의 첩자로 고구려가 백제를 물리칠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역사적 인물 도림의 이야기를 결합했다. 자신이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할 것이란 무녀의 저주에 시달리며 매일 밤 악몽을 꾸는 백제왕 개로. 그 꿈의 끝엔 항상 한 여인이 나와 그를 보살펴준다. 이에 고구려 첩자임을 숨긴 채 백제의 국승으로 개로의 옆을 지키던 도림은 그 꿈속 여인을 찾아 개로의 정신을 뺏고 전쟁을 일으킬 계략을 세운다. 하지만 현실에서 개로가 마주친 꿈속 여인 아랑은 자신의 충신인 장군 도미의 아내. 작품은 이를 통해 가질 수 없는 것에 욕망하고 집착하는 개로가 자신이 지켜야 할 백제는 물론, 결국엔 자기 자신마저 파멸시키고 마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판소리로 극의 전반을 해설하는 도창은 박인혜와 정지혜가 맡았다. 특히 박인혜는 ‘아랑가’에 등장하는 모든 판소리를 직접 작창해 작품에 특별함을 더했다. 뮤지컬에 등장하는 판소리가 이질감을 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은 기우다. '아랑가'에 등장하는 판소리는 오직 이 작품만을 위해 만들어진 만큼 오히려 극의 흐름을 매끄럽게 하면서 관객들의 집중도를 단숨에 높이는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판소리로 그려지는 극의 주요 장면들은 실제로 눈 앞에서 보는 것보다 한층 더 처절하고 생생해서 관객들의 마음을 그대로 관통한다.
최대한 덜어내고 비워낸 간결한 무대를 가득 채우는 건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의 역량이다. 개로 역의 강필석은 무녀의 저주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유약한 모습부터 사랑으로 파멸에 이르는 개로의 모습을 가슴 아리게 그려낸다. 아랑 역의 김다혜, 도미 역의 이율, 도림 역의 이정열, 도창 역의 박인혜까지 모든 배우들이 넘치게 본인의 몫을 해내며 작품을 꽉 채운다.
뮤지컬 '아랑가'는 채우려 하기 보다는 비워내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한 폭의 동양화처럼 작품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다. 오는 4월 10일까지 충무아트홀 중극장블랙에서 공연된다.
사진=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