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보인터뷰] 박은석 ① “스스로 고생하는 스타일, 그러나 이것이 나의 길”
[제니스뉴스=임유리 기자] 배우 박은석이 드라마 '역적'을 막 끝낸 후였다. 거짓말처럼 미세먼지 없이 쾌청하던 어느 날 제니스글로벌 화보 촬영현장에서 박은석을 만났다.
"원래 애늙은이처럼 인생 얘길 많이 한다. 헛소리 대마왕이다"라던 박은석과의 인터뷰는 작품뿐만 아니라 그의 전반적인 삶에 대한 태도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직접 만난 박은석에게선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좋은 의미의 고집과 강인함이 느껴졌다.
내뱉은 말을 지킨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누구나가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박은석은 묵묵히, 그의 말을 빌리자면 꾸역꾸역 그걸 해내고 있었다. 바로 그게 박은석을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한 힘이 아닐까. 앞으로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이 그의 말대로 이뤄져 갈지 궁금해진다.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배우 박은석과 함께 나눈 이야기를 이 자리에 전한다.
처음 한국엔 어떻게 오게 된 건가.
진짜 그냥 맨땅에 헤딩한 케이스다. 연기가 하고 싶어서 '여름방학이니까 한번 나갔다 와서 생각해보자' 했는데 그 이후로 12년째 안 들어가고 있다(웃음).
당장병이 있어서 뭔가 생각나면 바로 일어나서 움직인다. ‘나중에 해야지’가 안 된다. 생각이 나면 행동해야 되고, 말도 해야 된다. 그리고 입으로 내뱉으면 지켜야 된다. 그렇게 인맥도 없고, 집안이 넉넉한 것도 아닌데, 그냥 무모한 생각 하나만으로 한국에 왔다. 꾸역꾸역 영어강사도 해보고, 영화사에 들어가서 스태프로도 일해봤다. 원래는 패션 전공이었으니까 옷 가게에서도 일했었다.
그렇게 한국에 들어와서 한 경험들이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됐나.
오디션 볼 때마다 다 떨어졌었다. 혼혈이었으면 문제가 안 되는데 생긴 건 한국사람인데 혀가 굴러가니까 ‘사람들이 너 안 좋아한다’, ‘한국에서 절대 배우 못한다’는 얘길 정말 많이 들었다. 근데 그런 얘기들이 사실 나한테는 힘이 됐다. 왜냐면 난 그 반대의 얘길 들으려고 노력한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들으면 ‘언젠가는 내가 만들어서 오겠다. 나를 TV에서, 무대에서 보게 될 거다’ 이렇게 말했다. 그래 놓고 집에 오는 길에 또 걱정하고(웃음). 스스로 고생하고 피곤하게 사는 스타일이다.
옛날에는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걱정 많이 했었다. 그래서 반대되게도 살아봤는데 너무 내가 아니고 부자연스러우니까 다시 돌아오게 됐다. 지금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그대로 가자, 이게 팔자다’ 하고 있다. 이게 내 길이니만큼 그냥 가는 거다. 'Simple is simple(심플 이즈 심플)'과 모든 복잡한 걸 거쳐서 심플로 돌아오는 건 다른 거다. 연기에도 적합한 말인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조금 더 열심히 뭔가 막 열정적으로 연기를 하려고 해서 했는데, 지금은 이 대사를 어떻게 하면 가장 자연스럽고 심플하게 해서 명확하게 전달하고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지 생각한다.
무대 위에서 대사를 종종 박은석 스타일로 바꾼다. 그런 것도 연장선인가.
의도적으로 그런 건 아닌데 연극 속 대사를 보면 너무 정해져 있다. 사람이 말을 할 때 명확하게 A부터 Z까지 가진 않는다. 호흡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고, 말을 하다가 다른 데로 새기도 하고, 다른 단어가 잘못 튀어나올 수도 있다. 그런 생생함이 좋다. 그래서 최대한 그걸 살리려고 한다. 화났을 때 해야 하는 장문의 대사가 있을 때 막 치는 것보단 화가 나서 주체가 안돼서 못 치고, 호흡이 멈추고, 덜컹거리고… 이런 순간들이 생동감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찾으려고 계속 노력한다. 어느 날 공연을 하다가 그게 자연스럽게 찾아올 때가 있다.
어제도 공연하는데 갑자기 예상치도 못한 부분에서 걸린 거다 내가. 감정이 딱 걸렸는데 평상시에는 그냥 툭 치는 대사들인데 그게 정말로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와 닿으니까 갑자기 회의감이 들더라. 내가 여태까지 한 공연은 여기서 그냥 넘어갔는데 갑자기 오늘 그게 탁 걸리니까. 그럼 내가 전에 했던 삼십 몇 회 차는 거짓말이었나? 이런 회의감이 오더라.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연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됐다.
연기라는 게 그 순간뿐만이 아니라 계속 이어져 오는 어떤 감정 상태의 변화, 상대방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오는 감정들과 나의 감정들, 환경 이런 걸 다 느낄 수 있고 볼 여유가 생겨야 한다. 단순히 대사, 연출님의 지시 이런 것뿐만이 아니다. 그래서 너무 힘들다. 하면 할수록, 파면 팔수록.
연극하면서 꾸준히 드라마도 해왔다. 드라마의 매력은.
드라마가 제일 좋은 건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다는 거다. 공연은 볼 수 없으니까. 근데 또 공연은 즉각적인 반응이 있고, 드라마는 아니다. 집에서 와인 한 잔 하면서 제3자의 입장에서 내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 처음엔 진짜 오그라들었다. 이제는 그걸 떠나서 작품 안에 있는 나의 모습, 스며들어가 있는 그 캐릭터를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됐다. 드라마는 부모님이 미국에 계셔도 볼 수 있어서 그게 또 좋더라.
이번엔 처음으로 사극에 출연했다. 어땠나.
처음엔 진짜 걱정을 많이 했다. 내 인생에 사극이 있다 하더라도 4-50대쯤이라고 생각하면서 아예 배제하고 있었던 장르다. 근데 너무 빨리 하게 돼서 겁도 먹고 걱정도 많이 했다. 원래 대사도 내 마음대로, 내 스타일대로 하는 편인데 사극 같은 경우는 정해진 단어, 어미, 문법도 달라서 힘들었다. 그걸 명확하게 토씨 하나씩 외워야 하니까. 평소엔 최대한 많이 연습을 안하고 머리로만 돌린다. 입 밖으로 대사가 나왔을 땐 프레시함이 있어야 되니까. 사극은 그게 안 된다. 명확하게 연습을 해야 된다. 다행히 ‘역적’이란 드라마는 웰메이드 스토리라서 미국에서 온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힘들었지만 재미있었다. 끝나고 나서 보람도 있다.
이번 ‘역적’에서도 그렇고, 드라마에선 악역을 주로 연기했다.
악역이라고 해도 분명히 그 캐릭터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일단 작가가 하려는 말이 뭐고, 무엇을 전달하려고 하는 건지 큰 덩어리가 있다. 그럼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인물들이 있고.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이 사람은 무슨 역할을 하고, 이 사람은 거길 어떻게 받쳐주고… 그래서 내 캐릭터가 이 스토리 안에 존재하는 이유, 그게 여기까지 어떻게 이어질 것이냐. 너무 당연한 건데 그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이 장면에서 ‘못돼 보여야지’가 아니라 왜 못돼야 하는지.
수학이는 노비한테 아버지가 살해돼서 분명히 정당성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홍길동을 미워한다. 홍길동이 나아가는데 제재를 하는 장치가 필요한 거다. 너무 평탄하면 드라마라고 할 수 없다. 누구도 볼 필요가 없다. 악역하면 외롭다. 그래서 착한 역할도 해보고 싶지만 어떤 배역이든 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로 호흡을 맞춘 배우는 누구인가.
신희섭과 서이숙 선배님이다. 서이숙 선배님이 처음에 도움 많이 주셨다. ‘월계수’ 끝나고 바로 다음날 캐스팅돼서 며칠 후에 촬영 나갔다.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갔더니 분장하고 상투 틀고 유생을 만들어놓더라. 엊그제까지만 해도 풀 슈트를 장착하고 있었는데. 현장에서 감독님이 이런 캐릭터고, 이랬으면 좋겠고, 이런 신이고 얘기하시는데 톤도 모르겠고, 사극도 처음이고. 근데 그때 서이숙 선배님이 불러서 리허설을 해주셨다. 촬영에 들어갔는데 장면이 재미있게 잘 나왔던 것 같다. “응, 잘하네.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은데?”해서 안심했다(웃음).
수학의 마지막은 마음에 드나.
전쟁하다가 죽을 줄 알았다. 사실 좀 일찍 죽기로 하긴 한 것 같다. 그래서 5월로 공연을 다 미뤄놨는데 5월이 됐는데도 안 죽는 거다. 죽어야 되는데(웃음). 근데 이게 끝에 가서 딱 노비가 됐을 때 ‘아~ 이래서 내가 살아있었구나’ 했다. 전쟁터에서 그냥 그렇게 죽었으면 잊혀졌을 것 같다. 근데 노비가 돼서 역사가 반복되고, 인과응보가 되는 게 재미있었다. 노비였을 때가 연기하기도 제일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그런 거 좋아하나 보다. 고생하는 거.
총괄 기획: 임유리 im@
기획 진행: 경지유 juju@
포토: 김다운(스튜디오 다운)
영상촬영: 신승준 ssj21000@
영상편집: 박수진 parksj@
장소: 티마하우스
의상 : BOB, 리바이스, 해지스, 아메리칸 이글, SIEG, 유니클로
슈즈 : 탐스, 팀버랜드, 스케쳐스, 스코노
액세서리 : LIE 아이웨어, MLB
헤어: 졸리(에스휴)
메이크업: 윤설희(에스휴)
스타일링: 오지은 oj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