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인터뷰] '박열' 최희서 ① "진정한 페미니스트, 가네코 후미코"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영화 ‘박열’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 도쿄에서 활약한 ‘박열’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러나 이준익 감독은 전작 ‘동주’를 통해 윤동주와 함께 송몽규를 그려낸 바 있다. 이번 ‘박열’도 같다. 박열의 대구엔 가네코 후미코가 위치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의 아나키스트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훗날 사회주의자와 교류하며 자신의 신념을 키웠다. 이후 박열을 만나 동거를 시작하며, 그와 함께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 한 대역죄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그만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관계다.
그래서 영화 ‘박열’에서 박열과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이 가네코 후미코다. 그 인물을 배우 최희서가 연기했다. 지난 2009년 데뷔했지만 영화판에선 다소 무명이 길었던, 그러나 지난 해 ‘동주’의 ‘쿠미’로 강한 인상을 안겼던 그가 다시 한 번 이준익 감독의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그간 연극과 단편 영화로 쌓아왔던 내공으로 가네코 후미코를 스크린에 살려냈다.
최근 제니스뉴스와 배우 최희서가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신인의 자세로 7일이나 1:1로 매체를 만나고 있는 최희서였다. 체력의 부침도 있을 터인데, 그 누구보다 환한 미소로 마주하는 최희서. 실제로 만난 그는 가네코 후미코만큼이나 자신의 뜻을 똑똑하게 풀어낼 줄 아는 배우였다.
영화가 개봉했다. 소감이 남다를 것 같다.
전 정말 재미있게 영화를 봤다. 첫 번째 봤을 땐 첫 줄에서 봤는데 제 모공만 보였고, 그 뒤에도 두 번, 세번 봤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이렇게 큰 영화에 주연을 맡은 건데, 보통 잠이 안 온다고 하던데.
맞다. 저도 잠을 못 자겠다. 분명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기분은 너무 좋고 행복한데, 악몽을 많이 꾼다. 어젠 친구들이 왕따 시키는 꿈을 꿨다. 몇 시에 자도 새벽 5시면 깨어난다. 밤에 집에 들어가서 기절하는데도 일찍 깬다. 그래서인지 머리가 멍한 느낌이다.
‘박열’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역시 ‘동주’ 때 맺었던 이준익 감독과의 인연 덕일까?
‘동주’에서 이준익 감독님과 작업할 때, 감독님이 후시녹음을 하면서 “가네코 후미코에 대해 들어봤냐?”고 물으셨다. “모른다”고 답했더니 ‘박열’ 포스터에도 담긴 흑백사진 한 장을 보여주셨다. “이 여자의 자서전이 있으니 읽어봐라”라고 하셨다. 그게 가네코 후미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가네코 후미코와 첫 만남의 느낌은?
대단한 여자였다. ‘이런 불우한 유년기를 거칠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슬프기도 했지만, ‘무너지지 않고 본인의 신념을 가지고 싸워야겠다’는 생각을 한 게 정말 대단했다. 그래서 “감독님이 이걸 영화화 한다면 응원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동주’의 차기작으로 생각중이다”라며, “시놉시스 회의 때 놀러와”라고 하셨다. 시놉시스 회의에 참여하면서 이 영화에 대해 다시 한 번 많이 배웠다. 캐스팅은 ‘박열’의 이제훈 씨가 캐스팅된 후 연락이 왔었다.
인연이라는 게 그렇게 묘하다. 사실 ‘동주’의 캐스팅도 정말 드라마틱 했다.
제 인생에 가장 영화 같은 일인 거 같다. 연극을 하면서 연습실에 지하철을 타고 갔다. 그 안에서 매일 대본을 보며 연습을 했다. 봤다. 그런데 어느 날 신연식 감독님이 맞은 편에 계셨던 거다. 아마 ‘쟨 뭐지?’ 하셨을 거다. ‘오디션 가는 길이세요?’라고 물어보셔서, 그렇게 캐스팅이 됐다. 사람들은 길거리캐스팅이라고 하는데, 사실 제가 예뻐서가 아니라 특이하니까, 궁금해서 이뤄진 캐스팅인 것 같다. 하하.
어렸을 때 일본에 살았던 덕에 두 번 연속 일본인 캐릭터를 맞게 됐다. 이른바 조기 외국어 교육의 순기능이다.
하하. 맞긴 맞는 말 같다. 제가 원해서 살았던 건 아니니까, 어린 시절 일본에 살면서 일본의 교과과정을 받았다. 아마 고등학교 때부터 일본어를 배웠다면 발음이 이런 수준 까지는 아니었을 것 같다. 일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중3 때 미국에 갔다. 그때는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다. 사춘기 때 갔던 거였고, 동양이었던 일본과 달리 외모도 많이 달랐다. 언어도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하며 가장 힘들었던 점?
평면적으로는 강인하고, 사상가이고, 페미니스트이고, 아나키스트라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정의를 내리면 인간적인 후미코가 돋보이기 힘들었다. 사상가의 후미코를 보여주면서, 나약하면서도 사랑스러운 후미코를 보여줘야 한다는 고민이 컸다. 그래서 후미코를 인간적으로 이해해야 했다. 자서전을 보면서 ‘내가 그와 같은 어린 시절을 살았다면’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사실 후미코에 대한 설명은 이야기나 대사 안에 충분히 들어있다. 그러나 이 여자 본연의 모습은 어떨까 궁금했다. 사적인 모습, 내면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었다.
영화 속 여성들이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박열’은 달랐다. 또한 그것을 넘어 오랜만에 진취적인 여성,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만날 수 있었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렇게 강력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여성이라니’라는 생각을 했다. 여성은 폄하돼서는 안 되고, 이를 넘어 인간은 평등해야 하고, 그래서 절대권력이 존재하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사상이었다. 그래서 부담도 컸다. 처음 그에게 다가갔던 지점은 슬픔의 감정이었지만, 그가 축적해온 사상이 대단했다. 그의 사상이 담긴 것들이 영화 속 대사였다. 그 대사들을 제 것으로 만들기 위해 책을 많이 읽었다. 시나리오까지 합쳐서 그에 관한 책들이 5권 정도 됐던 것 같다.
가네코 후미코를 연기하고 개인적인 변화도 있었을 것 같다.
많이 바뀐 거 같다. 제가 문과이지만, 역사나 철학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그저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을 통해 1800년 후반에서 1900년 초반의 사상들, 세계적인 철학적 기조를 배울 수 있었다. 무엇보다 후미코가 진정한 페미니스트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100년이 앞선 시대에 핍박 받는 어린 시절을 거쳐 여성으로서 권리를 주장하고 남녀가 같은 선상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는 것이 자극적이었다.
저도 남동생이 있다. 무의식중에 성차별적인 발언을 해왔다는 걸 깨닫게 됐고, 그런 발언을 조심하게 됐다. 이를테면 “넌 남자가 그런 것도 못해?” “남자가 여자한테 그러면 안 되지”라는 것들이다. 요즘엔 여성휴게실 같은 것도 다르게 생각된다. ‘남성휴게실은 왜 없어?’ 같은 것들이다. 그런 쪽으로 제가 20배는 민감해진 것 같다.
가네코 후미코의 페미니즘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이 바로 ‘동거서약’이다.
맞다. 특히 동거서약의 첫 번째 조항이 인상적이다. ‘운동할 땐 여성으로 보지 않는다’라는 건 정말 엄청난 발언 같다. 그래서 폭탄의 유무를 숨겼을 때 박열에게 크게 화를 냈고 따귀를 때렸던 거다. 사실 그 신은 제가 너무 이제훈 씨를 아프게 때렸다. 원테이크 오케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하.
정말 사상이 통하는 커플만큼 뜨거운 커플도 없다. 이성관이 바뀌진 않았을까?
전 원래부터 말이 통하고 생각이 통하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많지는 않아도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을 보면 대화를 통해 가까워진 사람이 많다. 그래서 박열과 후미코의 관계가 낯설지 않았다. 물론 사상이 통한다 하여 제 여성성을 배제해달라고 할 정도로 파워풀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이 통하는 사람이라는 건 앞으로도 중요하게 생각할 것 같다.
사진=하윤서 기자 hay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