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인터뷰] '살인자의 기억법' 설경구, 고목나무에 꽃이 피는 이유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배우 설경구는 연기에 있어서 관객들에게 물음표를 드리우는 배우가 아니다. 그만큼 설경구의 연기는 흔히 말하는 '믿고 볼 수 있는' 신뢰를 받고 있다. 이미 완성된 배우라는 이야기, 허나 설경구는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을 통해 한 단계 더 올라선다. 더 잘 할 것이 없는 배우였는데, 그 벽을 부수고 또 한번의 명품 연기를 선보인다.
2017년은 여러모로 설경구에겐 기분 좋을 한 해다. 영화 '불한당'을 통해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왔다. 또한 1967년생, 50대 초입의 나이로 수많은 팬층을 새로이 영입했다. 누구는 일부러 영업을 펼친다는데, 본인의 말을 빌리자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할 일이고, 그의 스태프의 말을 빌리자면 "고목나무에 꽃이 핀 셈"이다.
그런 인기의 이유야 아무도 모르겠으나, 하나만큼은 확실히 안다. 꾸준히 자신의 연기를 해왔다는 것이 그 근간에 깔려있다는 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에서 보여준 설경구의 연기가 그 방증인 셈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던 설경구, 그가 이야기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에 대한 이야기를 제니스뉴스가 전한다.
노인 설경구의 모습, 인상적이었다.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는데, 전 ’나의 독재자’ 때도 노인을 연기했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특수분장은 일단 패스 했다. 기름기가 쫙 빠진 건조한 모습을 원했다. 그럼에도 감독님이 미안하니까 선뜻 말을 못하길래, “제가 한번 늙어볼게요”라고 했다. 너무 말을 쉽게 뱉었다. 일단 여러 선택지가 없었다. 살부터 뺐다. 정말 혹독한 과정이었다.
원작은 언제 읽었는지?
사실 촬영이 끝날 때까지 원작은 안 읽겠다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자마자 너무 보고 싶어졌다. 참고 참고 참다가 읽었는데, 정말 단숨에 읽었다. 시나리오보다 더 단숨에 읽은 것 같다. 소설을 읽고 첫 감상은 ‘그대로 영화화하기엔 무리가 있겠다’였다. 덕분에 시나리오도 계속 수정이 있었다.
시나리오에 수정이 많았나?
영화로 표현하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시나리오에 다이어트를 가하면서 태주라는 인물을 밖으로 끌고 나왔고, 대결 구도를 만들었다. 사실 원작에서는 병수 외에 다 기능적인 역할만 하는 인물들이었다. 입체적인 인물이 없었다. 덕분에 상업적인 구도가 만들어진 것 같다. 두 살인마의 대결이라는 것이 불편할 수 있다. 또 젊은이와 노인의 대결이라 더욱 그렇다. 그나마 병수의 살인엔 정당성을 부여했기에 다행이었다. 그리고 부성애 코드도 같은 일환이다. 딸을 지켜야 한다는 정당성이 생겼다.
소설 속 병수였다면 어땠을까?
그 사이코패스를 연기하라 하면 정말 머리가 터졌을 거다. ‘은희’를 지키라는 것도 이해하지 못했을 거고, 악인이 악인을 막는다는 것도 앞뒤가 안 맞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독님은 “같은 악인이지만 김병수를 응원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알츠하이머라는 설정 덕분에 끊임없이 녹음을 했다. 덕분에 내레이션 같은 연기도 펼쳤다.후시녹음으로 연기했다. 줄줄 읽는 부분도 있었고, 감정이 들어간 부분도 있었다. 내레이션이 주로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 그친다면, 이번 연기는 그렇지 않았다. 기억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한 자신의 생각 정리 같은 것이었다.
황석정-김병준과 함께 나오는, 시낭독회 장면에서의 내레이션이 정말 코믹했다. 무거운 영화에서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신이었다.
병수의 속마음이 내레이션으로 나온 건데, 실제로 두 분의 연기가 너무 재미있었다. 황석정 씨와는 연극할 때부터 워낙 친했다. 그래서 제가 농담으로 “내가 널 정말 죽일 것 같아”라고 했다. 아마 그 친구도 제가 편했기에 그런 애교 연기를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실제로는 애교가 없는 친구다.
병준이 형은 정말 몸짓 연기를 잘 하신다. 참 뻔뻔스럽게 그런 연기를 잘 하신다. 저도 배우이지만, 제가 한다면 부끄러워했을 것 같다. 병준이 형도 연기를 하시고 본인도 “허허”하고 웃으셨다.
그래도 웃을 일이 있는 신들이 있긴 있었다. 저는 사과를 쪼개려다 실패하는 신을 꼽고 싶다. 이게 참, 사람의 몸은 늙는데, 생각은 그대로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그럴 땐 옛날로 돌아가고 싶다. 하지만 지금도 좋다. 나이 먹는다는 건 마냥 나쁜 것만도 아닌 것 같다.
기술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어려웠을 연기가 많았다. 그중에서도 많이 힘들었다고 생각되는 신이 있을까?
다 어려웠다. 그중에서도 골라보자면 편집에서 짤린 부분이 있다. 은희가 녹음해 준 봄비를 들으면서, 자기 인생을 뒤돌아 보고 앞으로의 인생을 걱정하며 펑펑 우는 장면이 있다. 그때 감정이 쉽지 않았다. 태주와의 생과 사를 넘나드는 사투도 어려웠다.
눈에 경련이 시작될 때의 연기도 인상적이었다.
그거 정말 어렵다. 생각보다 잘 안 됐다. 소설엔 없는 지점인데, 일종의 기억을 잃어간다는 사인이다. 그 경련이 시작되면 시간이 옮겨 간다.
현장 분위기는 어땠을까? 작품이 무겁다 보니 마냥 유쾌하진 않았을 것 같다.
무거웠다. 특히 감독님이 고민을 많이 하셨다. 전작들은 영화의 템포가 빨랐다. 그땐 감독님도 참시 시원시원했는데, 이번엔 고민을 많이 하신 것 같다. 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감독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고 했다. 그래도 저만 있으면 현장이 암울했다. 김남길 씨나 설현 씨가 와야 현장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특히 스태프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본래 김남길 씨가 현장의 분위기메이커로 유명하다.
전 남길이는 안 늙는 거 같다. 현장에서 하는 행동이 똑같다. 스태프를 편하게 하는 장난이 참 좋다. 분장하는 친구부터 촬영감독까지 전부 친하게 지낸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 남길이에겐 다들 거부감이 없다. 딱 선을 잘 지키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촬영에 들어가면 얼굴이 딱 바뀐다. 부드럽게 연기로 싹 들어온다. 오히려 전 예민한 편이다
오달수 씨, 설현 씨와의 호흡도 좋았다.
오달수 씨의 연기는 너무나도 맛있다. 서로 친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정말 팬이다. 배우와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굉장한 분이다. 묘한 얼굴도 좋고, 눈빛도 좋다. 일상과 현장에서의 모습이 닮아있는 것도 좋다.
김설현 씨는 연기에 대한 욕심이 참 많았다. 배우와 김설현은 정말 잘 어울린다. 배우 욕심이 있으니 앞으로가 더 기대된다.
전작이지만 ‘불한당’으로 인해 생긴 새로운 팬덤에 대한 소감도 궁금하다.
‘불한당’ 개봉 후 깐느에 3박4일을 다녀왔는데, 그 뒤에 많은 것이 변화해 있었다. 솔직히 정말 당황했다. “왜 이런 거지? 무슨 일이야?”라고 했을 정도다. 솔직히 깐느에 갈 때 영화의 상황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팬들이 자체 대관까지 해서 영화를 본다 하니…, 그런 일, 정말 감동이었다. 전문용어로 화력이라고 한단다. 배우들이 다 같이 한번 다녀왔고, 개인적으로 그 모임에 한번 다녀왔다. 정말 모르겠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생긴 거다. 느닷없이 내게 과분한 일이 생겼다. 진짜 감동 받는다. 눈물 나온다.
‘설탕’ 같은 별명도 생겼다.
편하게 불러주시는 것도 좋다. 정말 큰 힘이 된다. 손편지도 받았다. 정말 정성이 넘쳐나는 편지였다. 스태프들도 많이 놀랐다 “고목나무에 꽃이 피나보다”라고 말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생긴 것 같아서 아직 즐기지는 못하고 있다. 그냥 감사하고 있을 뿐이다.
‘살인자의 기억법’을 넘어 기다리고 있을 차기작 ‘우상’에 대해서도 소개한다면?
우선 한석규 선배님과의 촬영이다. 한석규 선배님은 제가 처음 영화할 때부터 우상으로, 로망으로, 부러움으로 존재하셨다. 너무 기대된다. 한석규라는 이름만으로 느껴지는 아우라가 있다. 물론 영화 내에서 많이 만나진 않는다. 하지만 너무나 기대된다.
사진=쇼박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