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마수연 기자]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생각하는 모토 중 하나가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자’, ‘쓰임이 많은 배우가 되자’예요. 선역도 잘한다는 말은 그런 부분에 부합이 되죠. 저는 어딘가에 특화됐다는 말을 안 좋아하는 거 같아요. 다 잘할 수 있거든요. 물론, 판단은 대중들의 몫이지만요”
배우 박기웅이 출연한 MBC 드라마 ‘신입사관 구해령(이하 ‘구해령’)’이 지난 9월 26일 마지막 방송을 끝으로 시청자들과 이별했다. 조선시대 여성 사관(史官)이라는 참신한 소재와 청춘 로맨스의 조화로 첫 방송부터 종영까지 무척이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제니스뉴스와 박기웅이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신입사관 구해령’ 종영 인터뷰로 만났다. 극중 박기웅은 장수의 기개를 갖춘 왕위 계승 서열 1위 왕세자 이진을 연기했다.
박기웅은 대중들에게 악역으로 더욱 잘 알려진 배우지만, ‘구해령’에서는 사관들의 든든한 편이자 도원대군 이림(차은우 분)을 아끼는 형, 정치적 소신이 확실한 왕세자로 변신해 안정적인 연기력을 선보였다. 직접 마주한 박기웅은 선하게 웃는 모습이 매력적이었고, 악독함이 아닌 다정함과 친절함으로 무장해 인터뷰 내내 웃음을 자아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후에 단막극으로 ‘상놈탈출기’라는 사극을 했어요. 그래도 2010년 드라마 ‘추노’, 2011년 영화 ‘최종병기 활’ 이후 오랜만에 하는 사극이었어요. 사극은 안 하면 하고 싶고, 생각나는 매력이 있어요. 머리가 길면 단발을 하고 싶고, 단발을 하면 기르고 싶은 것과 비슷하죠. 하하. 마침 사극이 하고 싶을 때 대본이 들어와서, 재미있게 촬영했어요. 신기한 건 이번 작품이 끝난 후에도 다시 사극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예요. 심리적으로 많이 소진되지 않았거든요”

모처럼 찾아온 사극, 선역, 그리고 일을 다스리는 왕세자. 그렇기에 박기웅은 이진을 연기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대전에서는 중견 배우들과 언쟁에서 밀리지 않는 위엄 있는 지배자여야 했고, 예문관의 사관들 앞에서는 그들을 믿고 진지해주는 든든한 뒷배가 돼야 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고민한 건 목소리 톤이었어요. 평소에 말하던 목소리보다 조금 더 저음으로 소리를 냈죠. 신뢰감을 주는 목소리를 내고 싶었고, 동시에 힘에서도 밀리지 않는 소리가 필요했어요. 극중 김민상 선배님의 역할이 예문관 사관을 적대시하는 인물이었어요. 저는 사관들을 보호하고 힘을 실어주는 역할이었기 때문에, 내전에서 선배님들과 기싸움을 할 때도 당위성 있게 표현해야겠단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제가 연기를 이상하게 하면 시청자들이 ‘우기는 거 아냐?’라고 생각하실 수 있잖아요. 걱정도 정말 많이 했어요. 완전히 제 목소리도 아니고, 평소 목소리와 말투도 아니어서요. ‘조금 인위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계속해서 녹음하고, 제 목소리를 들어보며 확인했어요”
위엄 있는 젊은 지배자와 젊은 사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군주 사이에서, 박기웅은 ‘구해령’ 속 이진처럼 외로움을 느꼈다. 대전을 지키는 선배 연기자들 사이에서는 막내, 예문관의 사관들에게는 선배인데다가 둘 중 어느 곳에도 완벽히 속할 수 없었기에. 그때 많은 위로가 됐던 사람은 극중 형제로 나왔던 이림 역의 차은우였다. 두 형제는 비슷한 외로움을 서로 함께 하는 장면을 통해 해소하며 돈독한 관계를 쌓았다.
“전 밝은 분위기에서 또래 배우들과 재미있게 촬영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혼자 고뇌하고, 선배님들과 싸우는 것들이 많았어요. ‘높은 사람들이 이래서 외롭구나’라는 간접 경험을 하게 된 거죠. 조금 외로웠던 거 같아요. 현장에서 그런 농담도 했어요. ‘조선시대로 돌아가서 왕이나 세자를 시켜준다’, ‘공짜로 대통령을 시켜준다’고 해도 절대 못할 거라고요. 하하. 은우도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은우 씨는 신세경 씨와 붙는 장면이 있지만, 대체로 성지루 선배님, 두 나인 역의 배우들과 함께 했으니까요. 계속 녹서당에 갇혀있기도 하고요. 저도 동궁전 아니면 인정전에만 있었거든요. 그래서 은우와 함께 하는 신에서 조금 해소가 됐어요. 같이 누워있기도 하고, 술도 마시고, 농담도 던지는 모습이 제 또래의 모습이잖아요. 실제 저는 똑똑하지도, 고급스럽지도 않아요. 그냥 헐렁한 사람이죠”
차은우의 이야기가 나오자 박기웅은 그의 칭찬을 한참이나 늘어놓았다. 빠른 1985년생인 박기웅과 1997년생인 차은우는 실제로 13살 차이가 난다. ‘구해령’ 속 이진과 이림처럼 나이 터울이 크기도 했고, 실제로 박기웅에게도 꽤나 나이 터울이 큰 동생이 있었기에 형제간의 돈독한 우애를 연기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이와 같은 현실적인 연기에는 차은우와의 호흡도 단단히 한 몫 했다고.
“저도 나이 터울이 있는 남동생이 있어서, 이진 같은 동생 집착이 있거든요. 하하. 동생에 대한 애틋함이 실제로 있어서, 이진에게 몰입하는 게 굉장히 쉬웠어요. 은우와 제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니까 어려울 법도 한데, 정말 살갑더라고요. 저희가 극 초반과 후반에 함께 촬영해서, 촬영 중간에 떨어져 있었어요. 그럴 때는 은우에게 먼저 연락이 와요. 그런 노력이 정말 고마웠죠. 이림이라는 캐릭터가 성장하는 것과 동시에 차은우라는 사람이 배우로서 성장하는 것도 보였어요. 아주 열심히 하지 않는 한, 한 작품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 예뻐하지 않을 수가 없죠.
촬영 후반에 서로를 향해 소리 지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둘 다 감정이 너무나도 올라와서 NG를 많이 냈어요. 울면 안 되는 장면인데, 은우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거예요. 전 ‘아무 것도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는 식의 대사를 하는데 너무 미안하더라고요. 눈물도 나고요. 그 감정을 덜어내느라 힘들었죠. 그래서 촬영이 끝나고는 아쉬웠어요. 그렇게 감정이 부딪히고, 호흡이 맞아 가는데 촬영이 전부 끝나버려서요”
드라마 후반 박기웅이 연기한 이진은 동생 이진과의 과거가 얽히고 설키며 왕좌에 오를 수 없는 상황에 닥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가 아닌 동생을 택한 이유를 묻자 그는 “너무 스탠다드하다”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림은 지나치게 스탠다드한 사람이에요. 융통성이 없는 건 아닌데, 워낙 바른 아이라서 죄를 지으면 응당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과 별개로 동생 이림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위하는 사람이죠. 그래서 이진의 행동이 이해가 됐어요.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죠. 만약 이진이 왕위에 야심을 가지고 있는데 급 마무리를 했다면 이해가 안 됐겠지만, 그저 동생을 너무 사랑한 동생 바보였거든요. 그런 점은 실제 저와 많이 비슷해요”
이처럼 ‘구해령’은 종영 직전까지 예측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흘러가며 결말을 쉬이 짐작하기 어려웠다.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 매회 추측하며 다음을 기다렸던 것처럼, 박기웅과 출연 배우들도 자신들의 앞날을 예측하는 재미를 즐겼다고 한다.
“이야기가 생각보다 예상 못한 쪽으로 툭툭 흘러갔어요. 그래서 현장에서 이런 대화도 많이 했죠. ‘넌 어떻게 되는 거야?’, ‘아버지 유배 가세요?’ 같은 거요. 그때 최덕문 선배님이 “난 죽어야 하지 않냐?”라고 하시더라고요. 하하. 각자 추측을 정말 많이 했어요. 결국은 어느 정도 권선징악도 이뤄지고, 이림과 해령도 본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성군의 조건이 충족되는 이진도 옳은 길로 갔고, 사희와 우원이나, 다른 캐릭터들도 복귀하는 기틀이 마련됐죠. 정리가 잘 된 거 같아요”

참신한 소재와 청춘스타, 중견배우의 호연이 어우러진 ‘구해령’은 최근 드라마 추세와 달리 자극적인 요소를 많이 덜어낸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9%(닐슨코리아 기준)라는 최고 시청률을 기록하며 시청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 이유로 박기웅은 착한 드라마라는 점과 당위성 있는 대본을 골랐다.
“‘구해령’은 착한 드라마였죠. 악역이라 할 수 있는 게 최덕문 선배님이 연기한 민익평 정도인데, 악역이라고 하기엔 굉장한 당위성이 있었어요. 다른 캐릭터들도 그렇고요. 그래서 연기할 때 걸리는 게 없었어요. 배우들도 연기하면서 ‘이게 말이 돼?’라고 생각하는 대본이 많거든요. 물론 그건 말이 안 되는 걸 욕하는 건 아니에요. 한국 시청자들은 연기의 리얼리티를 좋아하는데, 배우인 저희가 연기하는 건 리얼한 상황이 아니에요. 리얼하게 보이는 것처럼 연기하는 거죠. 드라마는 일상보다 버라이어티 해야 재미있잖아요. 그런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부분이기도 하고요. ‘구해령’은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이 사람이 이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정말 착한 드라마예요. 드라마가 착한 이유는 작가님이 착한 경우, 연출님이 착한 경우가 있는데 저희는 둘 다였던 거 같아요. 착하고 밝은 드라마에, 계절감도 잘 맞았어요”
제작발표회 당시 박기웅은 자신이 악역을 연기했을 때 승률 100%라며 자신감을 보인 바 있다. 그간 드라마 ‘각시탈’, ‘리턴’ 등에서 강렬한 악역을 연기하며 시청자들에게 박기웅이라는 이름을 각인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해령’을 통해 박기웅은 선역으로도 많은 호평을 받았고, ‘박기웅의 재발견’이라는 찬사도 들었다. 이에 박기웅은 자신의 목표에 부합한다며 기쁜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선역도 잘했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좋죠. 사실 제가 선역을 한다고 망한 건 아니에요. 하하. 악역을 할 때 워낙 좋았어서 많이 부각이 된 거죠. 하지만 그런 점이 아쉽지는 않고, 감사하고 좋아요. 사실 지금도 악역이 많이 들어오는데, ‘구해령’이 끝나고 나서는 반반이 됐어요. 악역은 기술적인 부분이 필요한 연기를 해야 해요. 매번 다르게 연기하고 싶은데, 저도 사람인지라 이전에 했던 특색 있는 악역 연기가 다시 나올 수 있잖아요. 그런 부분이 너무 고민 되고, 스트레스가 오더라고요. ‘선역도 잘할 수 있는데 왜 악역이 많이 들어올까?’라는 생각도 했는데, 이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거 같아요. 오히려 악역을 했을 때의 가능성을 제작자분들이 만족스러워 하셔서 작품에 불러주신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이제는 자연스럽게 바뀌어서, 지금은 악역과 선역 모두 상관없는 거 같아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생각하는 모토 중 하나가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가 되자’, ‘쓰임이 많은 배우가 되자’예요. 선역도 잘한다는 말은 그런 부분에 부합이 되죠. 저는 어딘가에 특화됐다는 말을 안 좋아하는 거 같아요. 다 잘 할 수 있거든요. 물론, 판단은 대중들의 몫이지만요. 저는 대중예술을 하는 사람이니까, 시청자나 관객 분들의 판단에 ‘박기웅은 악역이 낫다’고 하시면 그게 맞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다 잘할 수 있는 마음이 있고, 그렇게 되고 싶죠. 그래서 선역도 잘한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감동적이에요”
인터뷰 내내 박기웅은 ‘구해령’을 향한 남다른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했다. 배우로서 박기웅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안겨준 작품이기에 그의 새로운 대표작이 될 수도 있지만, 박기웅은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가 거쳐 왔던 매 작품이 소중하게 남았기 때문이라고.
“저는 대표작을 하나로 단정 짓지 않아요. ‘구해령’ 역시 대표작은 아닌 거 같아요. 저에게 ‘구해령’이 어떤 작품이냐고 물어보시는데,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제 소중한 작품 중 하나일 뿐이지,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고 시지는 않아요. 하지만 정말 소중한 작품인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제가 참여한 모든 작품이 그랬고, 다음 작품도 그럴 거예요. ‘구해령’은 박기웅의 배우 인생에 있어서 소중한 하나의 ‘내 새끼’인 거죠”
선역과 악역을 오가며 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이는 박기웅이지만, 그럼에도 그가 해보고 싶은 역할은 남아있었다. 그간 해온 진지하고 무거운 역할을 탈피해 가볍고 코믹한 캐릭터가 도전하고 싶은 다음 캐릭터라고 한다. 조만간 브라운관과 스크린에서 180도 다른 이미지의 박기웅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때보다 더 헐렁한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예전에 ‘멧돌춤’ 광고가 유명할 때는 코믹한 이미지 때문에 그런 캐릭터가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부잣집 재벌 3세 역할이 들어오더니, 세자를 넘어 왕까지 가더라고요. 이제는 각 잡는 역할이 너무 많이 들어와서, 완전 헐렁한 역할을 하고 싶어요. 잘할 수 있고요. 하하. 동네 백수 아저씨 같은 러프한 연기를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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