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돼지는 태어나서 그저 열심히 먹고 살 찌우다 새끼를 낳고, 도살 당해 죽어 인간의 음식이 된다. 여기엔 아무 이유가 없다. 그저 그렇게 살아갈 운명이었을 뿐. '재화'(황정음)의 삶에도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주정뱅이 아빠와 바람녀로 소문난 엄마, 그리고 아직 철없는 동생, 그런 가족 안에 태어났을 뿐. 그렇기에 별다른 불평 없이 열심히 돼지를 키우며 하루를 살아간다.
사랑도 그렇게 찾아왔다. 과거의 영화를 뒤로 하고 모두가 떠난 작은 어촌. 딱히 대단히 잘난 남자가 남아 있을리 만무하다. 그 와중에 잘 생긴 총각 '준섭'(이종혁)은 마을 처녀들의 희망이자 등불이다. 하여 자연스럽게 찾아왔던 사랑의 감정, '재화' '유자'(최여진) '미자'(박진주)의 시선은 언제나 '준섭'의 일거수일투족에 머무른다.

사람의 성격이 다 다르듯 '준섭'에게 다가서는 태도도 달랐다. '재화'는 거리를 두는 척 하지만 자신을 잡아 이끄는 '준섭'의 손을 뿌리치진 않는다. 적극적인 '유자'는 '준섭'이 빈틈만 보이면 언제고 덮칠 기세다. 두 사람의 라이벌 의식 속에 끼어있는 '미자'는 큰 내색 없이, 농담 삼아 그 마음을 고백하지만 곰곰이 곱 씹어보면 가장 슬프고도 애틋할 짝사랑을 하고 있다.
영화를 가볍게만 본다면 단순한 치정극이다. 하지만 메가폰을 잡은 장문일 감독의 손을 거치면 그 이야기가 달라진다. '행복한 장의사'(1999) '바람 피기 좋은 날'(2007)에서 감독은 결코 가볍지 않을 이야기들을 바람에 날리는 깃털처럼 유쾌하게 풀어낸 바 있다. 감독의 손 위에선 인간사 모든 감정들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그렇기에 술에 취해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주정뱅이의 고뇌도, 마을 처녀를 건드린 총각의 실수도, 친구의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의 어쩔 수 없는 순정도, 친구를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뛰어 다니는 여자의 광기도 한 없이 가볍게 다가온다.
하지만 유쾌하게 전해졌던 감정의 너울들은 어느 순간 그 가벼움에 무게를 더한다. 인생을 살며 거부할 수 없는 감정들, 그리고 상황들, 그래서 그 안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우리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안에 살아가는 돼지처럼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며 그렇게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돼지는 예로부터 '복을 전해준다'고 했다. 하루를 돼지처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언젠간 복이 찾아올 것이라 믿어본다. 영화의 끝자락에 나오는 '재화'의 한 걸음 한 걸음의 방향이 '행복'을 향하고 있는 이유다.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바다의 아름다움을 나름 영화 안에 잘 담아냈다. 특히 배 위에서 나누는 두 남녀의 로맨스는 황금빛 바닷물결을 따라 더욱 아름답게 빛난다. '나도 한 번 쯤 배를 타고 나가 보고 싶다'라는 기분이 든다. 함께 탈 연인이 있다면 금상첨화다. 더불어 통통배로 멋지게 등장하며 '재화'를 태우는 '준섭'의 모습은 '잘 빠진 스포츠카를 몰았어도 이 보다 여유롭고 멋있어 보이진 않았겠다'는 생각도 자리잡는다.
사실 '돼지 같은 여자'는 조금 묵힌 영화다. 크랭크업 한지 약 3년이 다 돼서야 개봉을 하게 됐다. 작은 영화의 개봉이 쉽지 않은 우리 영화계의 한 면을 비추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지난 두 영화로 몬트리올 국제영화제에 다녀왔던 장 감독은 이번 작품으로도 '비경쟁 신작' 부문에 이름을 올렸다. 오랜 산고를 겪은 작품이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기쁜 소식이다. 모쪼록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가 이어지길 기대해본다.
영화 '돼지 같은 여자'는 오는 10일 개봉된다.
사진=영화 '돼지 같은 영화' 스틸
저작권자 © 제니스글로벌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