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고등학교 시절, 영화 매거진이 전성기를 누릴 때 한 잡지에서 읽었던 기사가 있다. 세 명의 기자가 ‘좋아하는 배우’를 이야기하는 좌담 형식의 기사였다. 그 중 한 명이 ‘안성기’를 꼽았다. 그 이유로 “우리 엄마는 ‘저 양반이 광고하는 건 믿고 사면 돼’라며 그 제품을 산다”고 했다. “그래서 커피는 항시 맥x을 산다”고.
20년은 지났을 시간임에도 강렬하게 기억나는 기사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만한 이유. 그렇게 배우 안성기는 ‘국민 배우’라는 타이틀 아래 대한민국 영화 관객들에게 신뢰감이라는 감정을 안겨왔다. 배우로서 당연할 연기는 물론, 영화계의 어른으로서 영화 행정에도 힘 썼다. 나아가 그 흔한 스캔들마저도 안성기를 비껴갔다. 철저한 관리가 있었기 때문일 터다. 이쯤이면 영화계의 성인이라고 불려도 되지 않을까?
웬만한 기자들 보다 앞서 데뷔했기에 영화 기자는 배우 안성기의 필모그래피와 함께 경력을 쌓는다. 그래서 안성기와의 인터뷰가 더욱 설렜?? 인터뷰 시작에 앞서 “언제나 항상 그 자리에 계셔주셔서 감사하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안성기’라는 이름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 미소로 악수를 건넨다. 그렇게 제니스뉴스와 안성기의 인터뷰는 시작됐다.
★ 안성기, 액션 필모그래피를 새로 쓰다
이번에 안성기는 영화 ‘사냥’으로 관객과 마주한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산 속의 사냥꾼 ‘기성’. 시나리오 단계부터 안성기를 염두에 뒀기에 그 이름을 거꾸로 해 캐릭터 이름이 만들어졌다. 이번 작품에서 그는 줄기차게 산을 뛰어다닌다. 금맥을 노리는 엽사들을 피해 어린 시절부터 돌봐온 소녀 ‘양순’(한예리 분)을 지켜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해 배우 경력이 60년, 수많은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 게다가 ‘실미도’ 출신 - 인 안성기에게도 이번 ‘사냥’의 액션은 역대급이었다. “젊을 때 안 하고 왜 나이 들어서 이렇게까지 하나 싶다”라고 푸념을 했을 정도. 사회성 짙고 주제가 강한 영화를 해왔던 안성기가 ‘사냥’에 출연한 것은 어쩌면 한국영화의 장르가 그만큼 다양해졌음을 나타내는 방증이다.

촬영 전부터 온 스태프가 그의 강도 높은 액션을 염려했다. 국민배우라 하더라도 세월을 이겨낼 수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모두가 그의 체력에 혀를 내둘렀단다. 오히려 조진웅, 권율을 비롯한 후배 배우들보다 더 뛰어다녔던 덕에 그들의 원망을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후배들이 겉으로는 표현 못했지만 속으로는 섭섭한 부분도 있을 거다. 예를 들어 낙법 훈련을 하는데 출연한 엽사 배우들이랑 같이 했다. 보통 액션팀이 훈련시킬 때 내가 먼저 나서서 ‘이 정도는 못하겠다’ 하면 후배들도 쉴 수 있는데, 내가 시키면 시키는 대로 다 해버렸으니까. 하하. ‘미치겠다’라는 눈빛이 보였다. 특히 차순배 씨가 원망이 많았을 거다. 그가 엽사들 중에서도 가장 연배가 있었다. 체력적으로는 많이 힘들었지만, 정말 행복한 현장이었다. 연기 스펙트럼이 넓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서 색다른 기분이 들었다.”
‘사냥’ 속의 주인공들은 ‘기성’의 첫 등장에 ‘뭐야, 람보야?’라며 기겁한다. 그 모습에 관객도 고개를 끄덕이는 건 총을 둘러맨 모습도 그렇지만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안성기의 탄탄한 몸매 때문이었다.
“항상 기본적으로 운동을 하는 편이다. 보통 작품에서는 옷을 입고 있다 보니 잘 모르실 수 있지만, ‘사냥’에서는 몸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 조진웅 씨와 싸우는 장면이 많았기 때문에 제가 약해 보이면 설득력이 떨어진다 생각했다. 원래는 여름에 찍으면서 자연스럽게 보여드릴 예정이었다. 이야기가 흘러가며 옷이 하나 둘 벗겨지고, 그에 따라 기성의 내적 굴레가 벗겨짐을 표현하고 싶었다. 마지막 폭포신에선 본래 맨몸으로 일어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겨울 촬영이다 보니 소매 없는 티셔츠로 몸을 보여드리게 됐다.”

맞다. ‘사냥’은 본래 여름 촬영이었지만 한창 추운 겨울에 촬영했다. 그 가운데 마지막 장면은 차가운 폭포수 속에서 진행됐다. 한여름에도 들어가면 춥다는 폭포수다. 무척이나 추웠을 터, “괜찮았냐”는 질문에 안성기는 후배 조진웅의 열정을 먼저 치켜세웠다.
“난 오후부터 찍었지만 조진웅은 아침부터 찍었다. 물에 누워있는데 눈은 뜨고 있어야 했지, 그리고 떨지 않아야 하지. 아마 온 힘을 다해 찍었을 거다. 컷 하면 그 때부터 몸을 떨었다. 사실 배우들은 그런 모습 보여주기 싫어한다. 창피하니까. 나만 해도 그런 부분이 있다. 그런데 몸이 말을 안 듣고 계속 떨렸다.”
사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부터 어느 정도의 힘듦은 예상됐을 터다. 산 속을 그리 뛰어다녔으니 촬영의 노고를 이야기하면 무어할까. “산 속 촬영에 좋았던 점은 없었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남자라 화장실이 지천에 있어 좋았다”였다. “그거야 반대 지점의 한예리 씨는 힘들었던 점 아니냐” 따져 묻자 “밤이 많아서 좋았다”는 답이 나왔다.
“우리가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사이에 찍다 보니 밤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도 그런 비탈에서 뛰고 구르고 했으니까, 밤이 그렇게 따가운지 이번에 제대로 느꼈다. 하지만 반대로 그 많은 밤을 줍기만 하면 됐으니 정말 많이 먹었다. 또 차순배 씨가 더덕 캐는데 일가견이 있다. 몇 번 쫓아다니면서 나도 두어 번 정도 찾아냈다.”
★ 안성기, 국민 배우가 말하는 좋은 연기란?

‘사냥’이 극을 이끌어 가는 데는 두 가지의 커다란 줄기가 있다. 엽사들과 기성의 추격 스릴러, 그리고 기성과 양순의 드라마다. 기성은 과거 무너진 갱도에서 홀로 살아 남은 과거가 있는 인물이다. 그 트라우마를 표현하기 위해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는데 중점을 뒀다. 또한 팀 동료의 딸 양순과의 교감도 중요했다. 할아버지와 손녀 같은 관계, 이미 지난 2015년 개봉했던 ‘필름시대사랑’을 통해 같은 관계로 한예리와 호흡을 맞춘 바 있었다.
“진짜 우연찮게 관계가 그렇게 됐다. 묘한 인연이다. 무엇보다 이번에 한예리를 업고 뛰었는데 정말 가벼워서 다행이었다. 요즘 배우들은 정말 자기 역할들을 잘 해나가는 거 같다. 프로 정신으로 가득 차있다. 한예리 같은 경우는 은근히 힘든 역할이다. 팔푼이로 약간 모자란 눈빛, 선머슴 같은 모습, 사투리 중에 가장 어렵다는 강원도 사투리도 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영화 전체가 이상할 수 있었다. 아주 완벽하게 양순이를 소화해줘서 큰 힘이 됐다.”
그럼 좋은 연기란 무엇일까? 안성기의 좋은 연기론, 꼭 한 번 듣고 싶었다. 안성기가 이야기하는 좋은 연기란 “그 인물에 잘 녹아 있다는 것”이다. 배우가 그 인물처럼 느껴질 수 있도록 노력하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 연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된다면 모든 움직임들이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진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작품 속에서 배우가 아닌 캐릭터로 보여졌을 때, 상식이 아닌 본인 스스로 느끼고 캐릭터를 소화한다면 영화 속에 감정을 쏟아낼 수 있단다. 그렇다면 안성기는 좋은 연기를 펼치고 있을까?
“나 역시 잘 될 때가 있고, 안 될 때가 있다. 하지만 늘 고민하고 노력한다. ‘사냥’ 뿐만 아니라, 모든 작품 속 내 연기에 아쉬움은 늘 많다. 예를 들면 우는 연기를 잘 못 한다. 찍을 때도 어색하고, 나중에 볼 때도 어색하다. 음 다른 연기는, 내가 봐도 너무 잘 해서 그런지 특별히 안 떠오르는데? 하하하.”
농담 섞어 이야기했지만 아무도 웃을 수 없었다. 그만큼 그는 오랜 시절 연기에 자신을 던진, 수식어마저도 실로 묵직한 ‘국민 배우’이기 때문이다. 멋쩍은 웃음 뒤에 이어진 수십년간 감내해 왔을 연기에 대한 고민, 그리고 정점을 지키며, 세월을 마주하며 새로이 다가온 고민에 대해 토로하는 모습은 인터뷰 장소를 숙연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연기적인 것도 있지만, 우리들은 일상에서도 늘 고민하고 아쉬워한다. 사람의 감정은 느낌대로 가는 것이 좋지, 계산된 것은 좋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어느 순간 계산이랄 것 까지는 아니지만 분명 선택의 입장에 놓인다. 그 땐 항상 힘들다. 그 때 나의 선택으로 해낸 연기가 관객과 잘 맞으면 좋지만 잘 안 맞을 때도 있다. 그럴 땐 항상 실망스럽고 아쉽다. 연기는 늘 새롭고, 늘 힘들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인물 등을 만나다 보니 나이가 들었다고 연기가 좋아진다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고, 경력이 오래되면 오히려 상투적일 수 있다. 그래서 늘 변신을 꾀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땐 기성 배우보다 신인 배우가 연기적인 면에서 더 신선하지 않을까 싶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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