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블랙홀에 빠진 기분이었다”
영화 ‘하루’는 제목 그대로 하루 동안 일어나는 일을 그린 작품이다. 그런데 그 하루가 여러 번 반복 된다. 무한 루프 속에 활동이 자유로운 인물은 딱 세 명 뿐, 나머지 인물과 상황은 매번 똑같다. 그 하루가 편한 하루도 아니다. 의사 ‘준영’에겐 딸이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는 날의 반복이다. 당연히 준영은 하루 안에 딸을 구하고자 고군분투 한다. 배우 김명민은 그런 극한의 감정과 상황을 매일 되풀이 한다.
캐릭터에서 벗어나 배우로서 촬영 과정으로 보아도 블랙홀이란 말에 수긍이 간다. 영화 촬영을 흔히 여정에 비유한다. 그런데 촬영 현장이 매일 같았다. 매번 똑같은 곳으로 여행을 가는 셈이다. 똑같이 생긴 그림 안에 각각 미묘한 변화를 조금씩 덧칠하는 작업이었다. 감정으로나 행동으로나 연기해내기 참 힘들었을 일이다.
그렇게 ‘하루’의 블랙홀 안에서 빠져 나온 김명민과 제니스뉴스가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고민도 많았고, 고생도 심했던 작품이었다. 그래서 김명민은 자신있게 이야기 한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타임루프 소재 중에 제일 잘 만들었다”고.
반복된 하루 안에 살다 왔다. 거의 수렁과 같은 하루하루였다.
덕분에 에너지 소비가 컸다. 전 계산해서 나오는 에너지를 싫어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미리 계산 해서 반을 가져가고 나머지 반은 현장에서 채우는 편이다. 그때 날 것으로 채워가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하루’는 그게 불가능했다. 매일의 큰 감정은 똑같은데, 미묘하게 다른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무엇보다 계산을 미리 하지 않으면 타임루프가 안 맞는다. 사고 현장에 1분 일찍 도착했을 때와 늦게 왔을 때가 크게 달라지니까 엄청난 계산이 필요했다.
이해 된다. 딸이 차에 치이는 모습을 몇 번씩 바라본다. 그 때마다 감정 표현과 행동이 조금씩 달라져야 했다.
맞다. 그래도 가장 큰 감정을 쏟아낸 신도 있었다. 바로 딸이 치이는 순간을 목도한 신이었다. 그 전엔 이미 딸이 죽어있는 상황에 도착했었다. 그러나 그땐 정말 찰나의 순간을 두고 현장에 도착한다. 그리고 딸이 차에 치어 공중에 붕 뜨는 것을 목격한다. 이후 딸에게 걸어가는데, 과연 그때의 심정이 어땠을까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다. 오열을 하는 게 맞는 건지, 어떤 건지 답이 없었다. 촬영 당일까지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표출된 것이 자신의 얼굴을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내 자신이 너무 싫을 때, 내가 멍청하게 보일 때가 있다. 매번 하루가 반복될 때 마다 조금만 더 빨리 도착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실제 시간이 조금씩 단축됐다. 이번엔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걸 못했다. 감정의 답이 없는 상황에서 “리허설 없이 가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길에 쓰러져 있는 딸에게 다가가는데 등에 소름이 끼쳤다. 머리 속에는 ‘내가 조금만 빨리 왔으면 됐는데’라는 생각 뿐이었다.
즉흥연기였다는 말?
맞다. 추가 촬영 없이 한 번에 갔다. 아마 한 번 더 갔으면 그런 감정이 안 나왔을 거다. 내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슬프다, 괴롭다의 감정이 아니라 그냥 내가 너무 밉고 싫은 거였다. 귓가에 욕이 환청처럼 들렸다. 그런 감정이었다. 제가 제 얼굴 때리는 신도 아마 다시 갔으면 안 됐을 거다. 일단 한 번 때려봤고, 맞아봤으니 몸이 아프다는 걸 기억하고 있었을 거다. 하하.
기본적으로 가져가는 감정은 부성애였을 거다. 부성애로 인해 여러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안엔 도덕적으로 그릇된 선택도 존재할 수 있다. 아이가 있는 입장에서 그 선택을 모두 이해할 수 있었을까?
전 이해가 됐다. 모성애, 그리고 부성애는 극단적 이기주의라고 생각된다. 오로지 제 자식만을 위하는 감정인 거다. 전 사실 첫 설정부터 이해가 안 됐다. 혼자 있는 딸 아이를 두고 해외 봉사를 간다고? 아무리 대승적인 일이 중요하다고 해도 저라면 가지 않았을 거다. 봉사 활동에 가더라도 함께 갔을 거다. 그렇게 3개월 만에 귀국해서 딸을 보러 가는데, 공항 안에서 사탕이 목에 걸린 아이를 만난다. 역시나 의사이기에 그 아이를 도와준다. 저라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지점이다. ‘괜한 오지랖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부성애란 이기적이다.
또 하나 인상적인 신이 있다. 바로 비행기에서 깨어나는 신이다. 반복되는 하루의 시작이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인물들을 상대로 다른 감정을 갖고 잠에서 깨어나야 했다.
하하. 정말 공장처럼 찍어냈다. 항공사 직원들이 훈련하는 세트인데, 딱 6시간 빌릴 수 있었다. 그 시간 내에 깨어나는 신들을 다 찍었다. 그래서 계산이 필요했던 거다. 첫 번째 깨어나는 거 한 번 찍고, 다시 “두 번째 신, 레디 액션”이 들어간다.
연기의 신이라 불리는 김명민이라 해도 어려울 일이다.
힘든 작업이었다. 그러나 시나리오 안에 틀이 잘 짜져 있었다. 각 타임루프엔 일종의 키워드가 있었다. 비행기신이 딱 그렇다. 처음엔 그냥 깨어났고, 두 번째엔 놀람, 세 번째엔 분노, 나아가 절망, 체념, 후회 등 각 감정상의 키워드가 존재했다. 그렇게 하루 전의 하루를 곱씹으며 현재의 하루를 만들어 갔다.

요즘 타임루프 소재의 콘텐츠가 많다. 흥미로운 판타지 설정인데, ‘하루’는 뭐랄까 ‘극한의 타임루프’ ‘타임루프의 끝’ 같은 느낌이다.
정말 이런 타임루프는 다시 하면 안 된다. 촬영과정이 정말 식상했다. 시간이 반복되고 장소는 똑같다. 당연히 순차적인 촬영도 불가능하다. 한 장소에서 여러 시간을 찍는다. 첫 날, 둘째 날. 그런데 그게 거의 차이가 없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현실에 있는지, 영화 촬영 중인지가 헷갈릴 정도로 혼돈이 온다. 주연 배우만 그런 게 아니다. 수많은 출연진들이 같은 현상을 겪는다. 처음에야 흥미를 가지고 찍는데, 하루 하루 지나갈수록 표정이 사라졌다.
더 지루할 현장인 것이, 파트너가 변요한 씨였다. ‘육룡이 나르샤’에서 그렇게 오래토록 봤던 인물이다.
그땐 제 호위무사여서 제 말을 참 잘 들었는데 이번엔 제 멱살을 잡았다. 하하. ‘나르샤’ 때 요한이의 칼에 스러져갔던 애들의 마음이 느껴졌다. 정말 힘이 좋다. 실제 붙는 신이 많지도 않은데 그때마다 멱살을 잡혔다. 그 힘이 영화에 고스란히 보인다. 물론 힘들지만 그걸 상대 배우가 도와주지 못할 망정 깰 필요는 없다. 아프더라도 참아야한다. 요한이는 그런 에너지가 있다. 동년배들이 가지지 못한 에너지와 진실된 태도, 그게 보이는 배우다.
그 고생을 했기에 좋은 타임루프 영화가 나왔다.
같은 소재라도 어느 감독이 연출을 하고, 어느 배우가 연기를 하느냐에 따라 결이 달라진다고 본다. 자신하자면, 국내 타임루프 작품 중에 제일 낫다고 생각한다. 완성도에서는 가장 높은 작품 같다. 흥행? 그건 하늘의 뜻이니까. 하하.
사진=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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