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마수연 기자] 스크린과 브라운관에서 배우 김명민의 존재감은 언제나 빛을 발한다. 때로는 가볍고 유쾌하게, 때로는 무겁고 진중하게 극의 중심을 잡는다.
이러한 김명민의 강점은 영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도 유감없이 드러난다. 장사상륙작전을 지휘한 유격대 대장 이명준으로 분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772명의 학도병을 이끄는 강하고 심지 굳은 리더를 연기했다.
다른 주연 영화와 달리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에서 김명민을 향한 조명은 대단하지 않다. 출연 분량을 덜어내고, 그에게 향하는 시선을 돌린 대신 유격대의 리더로서 이들의 이야기를 든든하게 뒷받침한다. 이와 같은 김명민의 무게감이 자칫 어수선하게 분산 될 수 있는 영화의 스토리를 장사상륙작전에 집중하게 만든다.
무거운 사명감을 가진 영웅으로 돌아온 김명민을 지난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장사상륙작전을 향한 진솔한 마음과 후배들을 향한 애정까지 듬뿍 담긴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공개한다.

Q. 영화 어떻게 봤나요?
너무 좋았어요. 다른 전쟁영화와 확실한 차별점이 있어서 좋았죠. 곽경택 감독님과의 작업에 많은 기대를 했어요. 처음 이 작품 제안을 받았을 때는 감독님께서 메가폰을 잡기 전이었어요. 당시에는 대본도 엉성해서, 처음 대본을 보고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 이후에 곽 감독님이 들어오시면서 대본이 바뀌고, 각색이 되면서 인물이 잘 살아났어요.
Q. 출연을 결정하게 된 이유가 궁금해요.
새 대본을 본 후 장사상륙작전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는데 사료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참전용사 인터뷰와 감독님께서 유족들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에 입각해서 공부했어요. 그러다보니까 ‘분량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조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인천상륙작전은 다들 아는데, 이 작전을 성공시킨 양동작전의 최고봉인 장사상륙작전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배우로서 궁금했어요. 열심히 살고 도덕적으로 위배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런 역사를 알리고 사회에 환원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나 먹고 잘 살거나 입지를 굳히고, 입신양명 같은 걸 제외하고 배우로서 해야겠다는 사명감이 왔어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같은 마음으로 촬영했을 거예요.
Q. 직접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식에도 참석했다고 들었어요.
매년 9월 6일에 장사해변에서 전승기념식이 열려요. 이번에 그 행사에 참석했는데, 열 분 남짓 살아계시는 참전용사 분들과 그분들의 유가족들이 오셨어요. 그 용사님 중 한 분께서 편지 낭송을 하시는데, ‘내가 너희들에게 조금이나마 죗값을 치를 수 있을 거 같다. 우리를 위한 영화가 만들어진다.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너희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많은 사람이 알아주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일인 거 같다’고 말하셨어요. 그 분은 지금까지도 이 작전을 알리기 위해 힘쓰고 계세요. 약 20여 년 전에야 해병대에 의해 그분들의 유골이 발견됐다고 하니 가슴 아픈 일이죠. 그래서 그런 숙연함, 사명감으로 작업에 임했어요.
Q. 기대했던 곽경택 감독님과의 작업, 경험해보니 어땠나요?
감독님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가 있어요. 정말 통쾌하시고 사이다 같으신, 그러면서도 디테일하면서 감정을 움직이는 감독님이라는 점이죠. 현장에서 함께 배우와 호흡하는 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실제로 작업해보니까 알겠더라고요. 컷 다음에 바로 오케이가 나오는데, 그게 우리에게는 해갈되는 느낌이었어요. 전쟁 장면이 정말 힘든데, 컷 이후에 오케이가 빠르게 나오지 않으면 힘들거든요. 감독님께서 항상 배우들을 향한 배려를 염두에 두고 철두철미하게 준비하셨어요. 힘들고 숙연한 촬영 현장이고, 편하게 웃을 수 없었음에도 즐겁게 잘 찍었어요.
Q. 감독님이 합류한 후 시나리오가 많이 바뀌었다고 했어요. 어떻게 바뀐 건가요?
전체적인 부분이 아주 좋게 변했어요. 어느 부분이 달라졌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요. 각색이 매끄럽게 잘 빠졌다고 해야 할까요. 감독님의 손을 거친 후에 영화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지 명확하게 드러났어요.
Q. 곽경택 감독님과 김태훈 감독님 두 분이 공동 연출을 한 영화예요. 새로운 시스템 적응이 어렵지 않았나요?
감독님이 두 분이지만 정확히 분야가 나뉘어져 있어요. 대부분 곽경택 감독님이 작업하시고, 김태훈 감독님은 전체적인 스케일을 담당하셨어요. CG가 많이 필요하거나, 스턴트맨이 투입되는 장면을 촬영하셨죠. 그동안 곽 감독님은 계속 대본 작업을 하셨어요. 저희가 불편한 건, 두 감독님이 왔다 갔다 하는 동안에 현장에 계속 있어야 했다는 정도? 하하. 콘티가 정확하게 있어도 촬영하다 보면 달라지는 게 전쟁 영화니까요. 그래서 항상 현장에서 스탠바이를 해야 했어요.

Q. 유독 신예들이 많았던 현장이었는데, 선배로서 책임감을 느꼈겠어요.
저는 뒤에 빠져 있었죠. 어린 친구들이 워낙 잘하기도 했고요. 나이를 먹을수록 지갑을 열어야지, 입을 열면 안 돼요. 지금 돌아보면 조금 더 열 걸, 후회가 되네요. 하하. 제게 먼저 다가와서 물어보는 아이들이 있으면 가감 없이 다 얘기해줬어요. 정말 잘하고, 연기하는 모습들이 너무 예뻤어요. 몸을 안 사리는 학도병 그 자체예요. 현장에서 다들 인사하고 서로 격려하는 분위기였죠. 제 역할 자체가 그 친구들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지켜보는 입장이잖아요. 그래서 김인권 배우와 아이들을 먹일 맛있는 것들을 찾았어요.
Q. 어린 후배들을 보면서 많은 자극을 받았을 거 같아요.
그렇죠. 그들의 모습 자체가 제게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어요. 학도병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동화가 되고, 69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을 받았어요. 심지어 그 친구들이 쉬는 시간 동안 대기실에 안 가고, 참호에 드러누워서 같이 놀더라고요. 그런 모습마저도 영감이 됐어요. 학도병들이 69년 전 치열하게 전투를 치렀지만, 결국 아이들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 아이들이 6일간 계속 인상만 쓰고 희망을 포기한 채 있지는 않았을 거예요. 언제 총탄이 날아올지 모르는 적진 속에서 웃고, 장난을 쳤을 거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그런 생각을 하니까 더 가슴이 먹먹하더라고요.
Q. 후배들을 통해서 연기하던 옛날 김명민의 모습이 떠오르진 않았나요?
요즘 세대 아이들은 정말 영악하고 잘하는 거 같아요. 정말 똑똑해요. 감독님이 얘기해주시면 한 번에 이해하고요. ‘내가 신인 때 과연 저랬을까?’ 싶을 정도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잘해요. 환경도 많이 좋아졌고요. 신인 연기자들에게 선배로서 제가 해줄 말이 없어요. 먼저 다가오지 않는 아이들에게 먼저 말하는 것도, 잔소리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 같아서 조심하려 해요. 현장에서도 눈에 띄게 부족한 부분을 보이는 친구들도 딱히 없었고요.
Q. 군 복무 중인 최민호 씨 칭찬도 해주세요.
민호에게는 모두가 아는, 배우로서의 열의가 있어요. 민호가 중심인물이잖아요. 그런데도 항상 학도병이 출연할 때는 같이 준비해요. 너무 일찍 준비하다 보니까 열 시간 이상 스탠바이 하다가 못 찍고 간 적도 있어요. 그런 건 절 닮은 거 같아요. 하하. 연기를 뛰어나게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런 게 초석이 되거든요. 언젠가는 이런 것들의 덕을 볼 날이 있을 거예요. 정말 대견했죠.
Q. 관객에 따라서는 영화가 지나치게 애국심을 고취한다는 부담을 가질 수 있을 거 같아요.
저희 영화는 그런 부분이 거의 없는 편이에요. 상당히 자유로워졌죠. 물론 보는 관점마다 다를 수는 있지만, 시사회 끝나고 애국심을 고취하는 여타 영화와 달라서 좋았다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만약 애국심에 대해 그렇게 느끼신다면 영화가 진정성이 있고, 영웅들의 이야기를 기교 없이, 가감 없이 솔직하게 그렸기 때문일 거예요. 영화 속 학도병들은 누구도 영웅이 되고자 하지 않아요. 스스로의 미래를 어떻게 알겠어요. 어느 작전으로 가는지도 몰랐는데요. 그들이 가졌던 책임감과 사명감 때문에 지금 영웅으로 비춰지는 거예요.
Q. 최근 극장가 관중이 많이 줄어들었는데, 그럼에도 예비 관객들이 극장에서 장사리를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요?
꼭 봐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창피하지만 저도 장사리에 대한 이야기를 몰랐어요. 하지만 저는 이를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세대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청소년들 나이대의 학도병들이 현장에서 있던 거니까. 그 친구들이 본다면 우리보다 느끼는 바가 더 많을 거예요. 그들이 기성세대가 됐을 때 이런 이야기를 전해주는 게 역사고, 저희에게는 자부심이 되겠죠. 전승기념식 때 참전용사님들이 했던 말이 계속 맴돌아요. ‘우리는 미래를 지켰다. 후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달라. 69년 전 그곳에서 미래를 지킨 사람이 있었다’라고요.
Q. 유난히 애정이나 사명감을 느낀 작품 같아요. ‘장사리: 잊혀진 영웅들’이 김명민 씨에게 어떤 걸 남겼나요?
저의 가치관을 다시 잡아준 작품이 아닐까 생각해요. 예전에 어떤 작품을 하면서, 일개 배우지만 사명감을 느낀 적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위해 연기하지 않겠다’는 가치관이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흐리멍덩해질 무렵 또 한 번 저를 잡아주고 정립시켜준 작품이에요. 제가 언제 은퇴하고 눈을 감게 될지 모르지만, 배우로서 살아온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 될 거예요. ‘배우로서 살길 잘했다’라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요. 그래서 많은 분들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장사상륙작전이 많이 알려질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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