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대한민국 대표 여배우라는 찬사가 아깝지 않은 배우. 바로 윤여정이다. 홍상수, 임상수, 강제규, 이재용 등 내놓으라 하는 감독들이 그에게 손을 내밀고, 수많은 여배우들이 ‘리스펙(respect)’을 표한다.
때로는 거침없는 언변으로 동료 배우나 감독, 관계자들을 당혹케 하지만 그 또한 윤여정이기에 가능할 일이다. 그 이면에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 소위 요즘 말하는 ‘츤데레’의 매력이라는 걸 그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이제는 작품을 골라서 할 수 있다는 게 최고의 사치”라는 윤여정의 말이 성공한 배우의 잘난 체가 아닌 연기를 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표시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윤여정은 여전히 도전하는 배우다. 오는 19일 개봉하는 ‘계춘할망’을 통해 또 한 번의 변신을 했다. 그간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를 선사해왔던 윤여정. 하지만 이번엔 진정한 시골 해녀가 됐다. “나는 노배우”라고 말하면서도 그 위에 노인 분장을 덧칠하고 손녀 바보 할머니로 분했다.
시크한 이미지 속에 그간 아껴왔던 할머니의 무한한 사랑을 연기해 낸 윤여정을 제니스뉴스가 지난 9일 서울 삼청동의 한 까페에서 만났다. 윤여정과 나눈 대화를 이 자리에 전한다.
필모그래피가 엄청 나다. 그쯤 되면 연기도사 아닐까요?
영화만 따지면 편 수가 많지는 않다. 사실 TV 편 수를 합치면 저보다 많이 한 사람도 많다. 연기라는 게 오래해서 잘 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 연기라는 게 참 알 수 없다. 아마 내 연기는 많이 오염됐을 거다. 그래서 새로운 신이 나오면 제일 무섭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숙제다. 나이도 먹었고 작품수도 많다 하는데, 그럼 연기로는 날라 다녀야 할 때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똑 같은 얼굴에 똑 같은 목소리로 얼마나 많은 모습을 끄집어낼 수 있을까 라는 게 고민이다. 그래서 이 ‘계춘할망’으로 날 잘 건드려준 걸지도 모른다. 도회적인 이미지가 소진됐다 하니까.(웃음)
에디 레드메인, 그처럼 연기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2011)에 그가 나왔을 때 그 배우인 줄 몰랐다. 또 ‘사랑에 대한 모든 것’(2014)에서 스티븐 호킹을 연기한 것을 보고 나니 스티븐 호킹의 실제 얼굴을 잊어버리게 됐다. 지금도 스티븐 호킹을 떠올리면 에디 레드메인의 얼굴이 떠오른다.
후배들이 롤모델로 윤여정 선생님을 많이 언급하잖아요.
후배들 인터뷰까지 보진 않는다.(웃음) 그래서 책임감 같은 것도 없다. 롤모델이라는 거, 조금 웃긴 것 같다. 난 윤여정이면 되고, 본인들은 본인이면 된다. 예전에 전도연과 만났을 때 같이 술을 마시면서 ‘재미있다’ 생각했던 게 “롤모델이 없어요”라고 했다. 그 말이 참 맞다. 전도연은 전도연 다우면 되고, 나는 나 다우면 된다. 굳이 누군가를 따라갈 필요는 없다. 참 이렇게 이야기하면 대통령 담화하듯 기사가 나가곤 하는데 또 그럴까봐 무섭다.(웃음)
인생은 아무도 모른다. 여배우라고 해도 그 미래를 점칠 수 없다. 배우라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사람이 많다. 내 배우 커리어는 내가 봐도 놀랍다. 난 배우를 그만뒀었다. 거창하게 그만두는 게 아니라 우리 땐 시집 가면 그만둔다는 게 자연스러웠다. 내가 이야기하면 옛날 이야기 같지만 그 땐 여성운동 같은 말도 없었다. 배우를 하다 적령기가 되면 결혼을 했다. 사회풍조라는 게 무서운 게 결혼을 안 하면 큰일 나는 분위기였다. 외국 가서 살게 됐으니 자연스레 연기를 그만 뒀다. 다시 배우를 시작해서 70까지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남의 배우 인생까지 생각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이번엔 예능에도 나가셨잖아요?
되도록 안 하려고 한다. 난 영화로 평가 받는 건 괜찮다. 내 일이니까. 잘 못했다 하더라도 그건 자극이 되고 다음 번에 잘 하면 된다. 그런데 예능에서는 상황에 따라 이야기를 하는 건데 말 하나가 어 다르고 아 다르게 전달된다. 그게 기사화 되면 악플들도 달린다. 내 나이 70에 댓글로 욕 먹고 싶지는 않다.(웃음)
기사들이나 댓글을 찾아 보시는 편인가요?
나야 볼 줄 몰라서 안 찾아보니 다행인데, 매니저들이 전해준다. 적당히 걸러서 전하는 거겠지만 굳이 내 일이 아닌 거에 나가서 거론되고 싶지 않다. 이젠 남은 여생을 간단하게 살고 싶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의미를 두고 도전한다. 이재용 감독 영화야 돈은 주지 않는데도 그와 나의 역사가 있으니 하는 거고, 임상수 감독 영화는 내 연기 인생에 터닝 포인트를 준 감독이니까 한다. 그렇게 의미를 두고 작품을 하는 게 나의 최고의 사치다. 누군가 “신비주의시군요?”하고 묻던데, 아니다. 실용주의다.(웃음)
'꽃보다 누나'를 통해 동료 여배우와 여행도 다녀오셨다. 또 한 번 갈 생각은 있나요?
아마 나영석이 다신 안 갈 거 같다. 여배우들에게 질렸을 거다(웃음). 그 후에 나영석이 가자고 해서 아무 것도 모른 채 끌려갔던 게 '삼시세끼'다. 첫 회에 아무 것도 없는데 가서 개고생만 하고 왔다. 정말 최화정에게 엄청 야단 맞았다. 혼자 가기 싫어서 데려갔던 건데 너무 혼났다. "외국갈 때나 데려가지 이딴데 산골에 데려왔다"고(웃음).
나름 의리파였네요?
나영석이라는 사람을 내가 기분 좋게 봤다. '꽃누나'를 하기 전에 나를 섭외하기 위해 꽤 오랫동안 만났다. 우리 아들보다 한 살 어린 친구다. 처음 만났을 때 "'꽃할매'를 한다"길래 "그거 하지 마세요. 다른데서 벌써 날 쑤시고 있는데 이미 카피 나옵니다"라고 말하고 헤어졌다. 그런데 며칠 후에 전화가 왔다. “선생님 만나서 반성 많이 했다”했다. 놀라서 "내가 머리 모양이 이상하다 했냐, 옷이 이상하다 했냐" 물었더니 본인은 "'꽃할배' 이후 '꽃할매'를 하려고 했었기 때문에 자기 작품을 카피한다는 생각 없이 자동적으로 '한다'고 생각했다"며, "선생님이 말을 안 해줬으면 그냥 했을 거다"라 했다. 그렇게 인정하고 전화까지 해서 반성문 쓰는 잘 나가는 PD 없다. 잘 나가면 잘 나가는 값을 한다. 정말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참 기분 좋았다. 나보다 어린데 나보다 나은 현명함을 보일 때, 내가 그 나이였을 때 보다 현명한 사람을 볼 땐 참 기분 좋다. 그러다 정들었다.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또 하게 됐어요. 선생님들 사이에서 딱 중간을 맡았는데요.
딱 중간이다. 정말 진짜 같이 찍고 있다. 우리가 다 같이 살아온 역사다. 옛날엔 우리가 다 같은 드라마에 함께 출연했었다. 혜자 언니가 내 언니고, 난 동생이고, 나문희 씨는 나랑 여고 동창으로 나오기도 했다. 같이 시작했던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각 드라마에서 엄마 역할을 맡으면서 만나지를 못했다. 첫 포스터를 찍으면서 혜자 언니가 내 손을 꼭 잡으면서 “여정아, 이 작가가 우리 죽기 전에 만나게 할라고 이 작품을 썼나봐”라고 말해서 날 울렸다.

누구나 슬럼프에 빠지기 마련인데 일에 대한 열정을 찾는 비결이 있을까요?
인생의 쓴맛을 본 게 비법이라면 비법이다. 결혼 이전은 제 배우 커리어로 놓으면 안 될 것 같다. 그 때는 NG만 안 내면 "잘한다. 잘한다" 해주니까 진짜 잘하는 줄 알았다.
그러다 다시 배우를 하게 된 건 생활전선에 뛰어들면서였다. 그 때가 내 배우 생활의 시작일 거다. 정말 감사했다. 내가 대기업의 커리어우먼이었다면 십수년을 쉬었다 다시 회사로 갔을 때 절대 받아주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단역도 감사하게 일을 했다.
하지만 65살 넘어서부터는 엔조이하는 단계다. 환갑 넘으면서 ‘하고 싶은 것만 하리라’라고 결심했다. 돈을 쫓는 것도 아니고 유명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 작가를 골라서 할 수 있다면 그건 최고의 사치가 된다고 생각한다. 지금 난 무서울 게 없는 것 같다. Noting to lose, 잃어버릴 게 없다. 그래서 평화롭다.
그런데 이 작품 때문에 그 평화가 깨졌다. 영화 제목을 바꾸자 했다. ‘계춘할망’이라는 타이틀이 부담됐다. 그런데 결국 그대로 나왔다. 큰일났다.(웃음) 정말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대한민국에서 여배우로 살아가는 건 어떤 일일까요?
난 여배우가 아니라 노배우다. 그래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는다. 배우란 나에겐 일이다. 늘 생각했던게 난 타고난 끼가 없다고 느꼈기에 ‘배우를 하는 게 맞는 건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누가 ‘끼가 있다’ 해줬으면 좋겠다. 결국 배우는 특별한 직업이다. 인기라는 말에 의해 의미없이 추켜세워졌다가도 의미없이 무너져 내린다. 두 다리를 똑 바로 서지 않으면 많이 비틀거릴 수 있는 직업이다.
사진=콘텐츠난다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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