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통해 단연 충무로의 기대주로 떠오른 김태리. 영화계의 시선이 그의 향후 행보에 쏟아질 때 김태리의 걸음은 그리 바쁘진 않았다. 그렇게 신중히 골라낸 작품이었고, 그 주인공은 바로 장준환 감독의 ‘1987’이었다.
김태리의 선택은 옳았다. 장준환 감독은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연출가였고, 이미 ‘아가씨’에서 얼굴을 익힌 하정우가 출연했다. 더불어 김윤식, 유해진, 설경구, 강동원 등 앞길이 9만리인 배우에게 길잡이가 되어줄 연기 잘 하는 선배들도 대거 참여했다.
비단 겉모습 뿐이 아니었다. 영화 ‘1987’의 안에 담겨 있는 메시지는 묵직하다. 故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해 故 이한열 열사의 사망을 넘어, 6월 항쟁으로 치닫는다.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시기를 담은 작품이다. 비록 자신은 태어나지도 않았을 시절이지만, 1987년 연세대학생 ‘연희’로 숨을 쉰 김태리는 분명 배우로서 한 단계 성장하는 시간이었을 터다.
그렇게 1987년을 지금 우리 앞에 가져다 놓은 김태리와 제니스뉴스가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연기만큼은 그 누구보다 훌륭히 해내지만, 아직도 신인 배우라면 신인 배우. 그 누구보다 훨씬 더 긴장하고 있는 모습이 느껴졌던, 풋풋한 시간을 이 자리에 전한다.

‘아가씨’ 때에 비해 시간이 사뭇 지났다. 이제 인터뷰는 조금 익숙해졌을까?
처음에 비하면 아주 조금 더 편해진 거 같다. 어제도 자기 전에 즐거운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선배들도 그냥 영화 이야기 하러 간다고 생각하랬다. 하지만 솔직히 진짜 부담스럽다. 인터뷰란 건 정말 조심해서 말하게 된다. 허투루 이야기하면 안 된다. 많은 고민 후 해야 하는 대답 같다. 무엇보다 말 실수를 할까 무섭다.
그런데 제가 기억력이 정말 안 좋다. 전 작품을 하나 하게 되면 노트를 만든다. 거기에 작업 하면서 생각하는 것들을 적어 놓는다. 인터뷰를 오기 전에 그 일기장을 펴놓고 공부를 했다. 거기에 적혀 있는 것들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이번 작품은 재미와 시대적 아픔을 함께 담은 작품이라 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번에 예전 일기장을 펴봤더니 어떤 걸 느꼈는지?
‘아 내가 이 작품을 하면서 내가 갈피를 정말 못 잡고 있었구나’ ‘글씨를 너무 흘겨 써져서 못 알아보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를 연기했다. 다른 배우들 보다는 보다 어렵게 접근했을 것 같다.
1987년엔 제가 씨앗도 아닐 때였다. 하하. 시대 보다는 연희를 이해하려고 했다. 연희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운동을 피하는 이유는 뭔지, 그런 걸 생각해봤다. 감독님도 연희를 읽고 느낌이 어땠는지를 물어보셨다. 연희는 보통의 평범한 사람을 대변했던 거 같다. 우리 대다수가 그런 것 같다. 용기 있는 사람은 사실 적다. 그 외의 다수를 대변할 수 있는 캐릭터라고 봤다.

확실히 김태리의 대학 초년과 연희의 대학 초년은 달랐을 거다.
전 ‘마이마이’가 가지는 의미도 잘 몰랐다. 그 당시엔 김승진의 ‘스잔’과 박혜성의 ‘경아’가 인기 있었다고 들었다. 파가 나뉘어서 팬들끼리 신경전이 대단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전 음악에 대한 조회가 깊진 않았던 것 같다. H.O.T부터 동방신기까지 다 듣긴 했어도, 누구를 미친 듯이 좋아하진 않았던 것 같다. 연희처럼 대학 입시를 끝냈던 때를 생각해보면 굉장히 조용했고, 잠을 많이 잤던 것 같다. 처음으로 술도 마셔봤던 때다.
장준환 감독의 앞선 작품들을 챙겨 봤었는지.
‘지구를 지켜라’ ‘화이’ 등을 봤었다. 정말 다양하게 영화를 선택하신다. ‘화이’를 보고 참 많이 놀랐었는데, ‘1987’도 정말 많이 놀랐다. 감독님은 천재 같다. 하나에 몰두할 때 전부를 쏟아낼 줄 아는 분이다. 영화를 하실 땐 정말 잠도 못 주무신다.
정말 연기를 잘한다고 하는 선배들과 함께 촬영을 했다. 특히 유해진 씨와 붙는 신이 많았다.
굉장히 유쾌하시고, 아재 개그라고 하는 하이퀄리티 농담을 좋아하신다. 처음엔 그 개그를못 알아 듣고 헤맸다. 그런데 제가 그렇게 헤매면 싫어하시는 것 같았다. 농담 같은 걸 던지면 두뇌 회전을 ‘샥’ 해서 찾아냈다. 그렇게 대화를 했다. 유머러스하고 참 좋은데, 연기할 땐 정말 진지하시다. 연기를 보면서 ‘정말 깊이가 있구나, 시나리오를 넘어 연기로 깊이를 더할 수 있구나’라고 느꼈다.

가장 연기하기 힘들었던 신이 무얼까?
거의 모든 장면 다 심혈을 기울이고 최선을 다했다. 반면 또 모든 장면이 아쉬운 것 같다. 제가 볼 땐 항상 제가 표현하고자 했던 것에 비해 못 미치는 것 같다. 그래서 해진 선배님한테 “언제까지 이렇게 괴로워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선배님은 편하신가요?”라고 물었다. “불편해”라고 답하셨다. 언제나 그런 직업적인 고민을 해야 하는 것 같다.
강동원 씨와 첫 만남 때 얼굴에 검은 분장을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검은 칠을 했어도 예뻤다.
그게 생각보다 묻히는 게 잘 안 돼서 테이크를 꽤 많이 갔다. 묻히는 정도를 달리 했다. 그 중에 쓰인 테이크를 말하자면 상중하로 봤을 때 가장 상이었다. 영화로 볼 땐 웃을 수 있지만 그땐 나름 걱정이 많았다. 분장의 정도가 과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스크린으로 보니 재미있었다.
본인이 봤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신은 어떤 장면일까?
예고편에 나온 건데 “탁 치니 억”하는 장면이 실소가 나왔다. 이건 정말 블랙 코미디다. 그래서 ‘헐, 이게 정말 실화야?’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믿기지도 않았고,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정말 대단한 나라였다’ 싶다. 그런 것들이 묻히고 지나갈 수 있었다는 게 정말 소름 끼쳤다. 그래서 우리 영화가 감동적으로 다가올 수도 있는 것 같다. 만약 영화 속 인물 중 한 명만 빠졌다면, 역시 묻히고 지나갔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국 연희는 집 앞을 나와 보다 큰 골목으로, 그리고 대로로, 이윽고 시청에 이른다. 연희의 성장이자 우리 국민 의식의 성장이고, 나아가 대한민국 민주주의 성장 과정이다. 그래서 더욱 의미있는 엔딩이었다.
엔딩 장면은 아무래도 몹신이고, 장치도 많고, 특히 소리가 정말 벅찼다. 시나리오와 스크린의 영상이 가장 달랐던 장면이다. 연희는 사실 사람들의 연대를 믿지 않았다. 아무리 소리를 질러봐야 바뀌는 게 없다고 생각하던 아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바라봤던 광장의 그 광경, 아마 내 가족의 아픔이 구원받는 느낌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영화 ‘1987’은 배우 김태리에게 어떤 의미로 간직될까?
보다 더 지나봐야 알 거 같다. 연기적으로 고민이 많았던 작품이었고, 헤쳐 나가려고 더 노력했던 작품이었다. 아마 언제까지라도 기억에 남을 거 같다. 무엇보다 배우로서 부족한 걸 많이 느꼈다. 전 태생적인 성격이 마음이 많이 닫혀있는 것 같다. 남과 나를 가르는 게 강한 것 같다. 세상을 살기엔 좋은 성격인데, 배우를 하기엔 고생스런 성격이다. 어떤 인물을 만나서 그 마음에 닿기까지 여러모로 부족한 성격인 거 같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찌 해야 할까 고민이 많다.
사진=김다운 포토그래퍼(스튜디오 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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