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니스뉴스=권구현 기자] 최근 서울 종로구 팔판동의 한 카페에서 제니스뉴스가 만난 김상경은 매우 기분이 좋아보였다. 먼저 나서서 말을 걸고, 그 대화의 끝은 호쾌한 웃음으로 마무리 지었다. "제가 원래 수다스럽잖아요"라고 말하지만, 그와 함께 있는 사람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하여 "그건 수다스러운 게 아니라, 달변인 거다"라고 답했다.
어느덧 20년차 배우가 된 김상경이 자신이 가장 잘 하는 연기를 펼쳤다. 영화 '사라진 밤'의 형사 '중식'이었다. 대한민국 대표 스릴러 '살인의 추억'에서 형사를 연기한 이래 형사 역할을 멀리했던 김상경이다. 영화 '몽타주'를 통해 10년 만에 형사를 다시 꺼내들더니, 이젠 제법 형사의 옷을 자주 꺼내 입고 있다. 그만큼 부담도 덜었고, 그 바탕엔 내공이 쌓였다는 이야기다.
그 내공은 인터뷰 자리 내내 이어졌다. 김강우, 김희애라는 연기 잘 하는 배우, 그리고 신인이지만 감탄을 마지않았던 좋은 연출가 이창희 감독과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하여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 보다는 이 좋은 영화가 어찌 관객과 오롯하게 만날 수 있을까에 대한 염려가 더 자주 오고 가는 시간이었다. 김상경이니까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왜? 그는 달변가였으니까.
영화가 잘 나와서 그런걸까? 오늘 매우 기분이 좋아보인다.
원래 제 삶의 모토가 “오늘 하루를 즐겁게”다.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 영화 찍을 때도 현장 분위기가 무거운 걸 별로 안 좋아한다. 현장은 즐거워야 한다. 당초 폼 잡고 앉아 있는 스타일도 못 되고, 배우들이 데면데면할 때 사회를 보는 스타일이다. 할 이야기 없으면 날씨 이야기부터 한다. 오늘도? 이제 봄이 온 거 같다. 하하하.
그럼 ‘사라진 밤’의 현장은 스타일상 안 맞았겠다. 무거운 영화였는데.
전 그런 거랑 전혀 상관없다. 영화가 무겁다고 해서 현장의 분위기가 어두울 필요는 없다. 어차피 선수들이니까, 찍을 때만 딱 집중해서 찍으면 된다. 물론 저도 예의라는 게 있기 때문에 상대 배역하고 “하하호호”하며 지냈던 영화는 아니었다.
현장의 분위기 메이커로는 원래 유명했다. 요즘도 스태프 이름을 다 외우는지?
영화를 시작하면 제 루틴의 시작이 스태프 리스트를 받아서 차 앞에 붙여 놓는 거다. 최소 5회차에서 늦어도 10회차까지는 다 외운다. 이게 이름을 외워놓으면 가족 같은 분위기가 된다. 촬영 기간엔 가족보다도 더 자주 보고, 오래 붙어 있는 사이다. 와이프나 아들보다도 더 오래 보는데, “야” “저” 하고 부르기엔 뭔가 조금 그렇다. 마치 김춘수 시인의 ‘꽃’처럼 의미를 가지고 이름을 불러 본다. 하하하.
옛날 한 선배님이 “주연 배우가 할 일이 네 연기만 잘 하는 게 아니다. 현장이 돌아가는 모든 시스템을 알고 있고, 그걸 네가 신경 써야 한다. 자기 연기만 싹하고 집에 간다고 다 가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신 적 있다. 그때 많은 걸 느꼈던 것 같다.
어떻게 말하자면 또 형사를 연기했다. 하지만 달리 이야기하면 역시 이런 형사 역은 김상경이 제일 잘한다.
이젠 그런 캐릭터의 직업을 가지고 유치한 셈법을 하진 않는다. 형사 역할? 저보다 많이 한 사람도 있고, 적게 한 사람도 있다. 이젠 ‘인물이 어떠냐’가 중요하다. 같은 형사라 해도 다 결이 다른 형사들이다. 하지만 이번 형사는 저랑 가장 매칭이 되는 거 같다. 아무래도 프리 단계 때부터 이창희 감독과 술을 많이 마셔서 반영이 된 것 같다. 시나리오 때부터 참 좋았다. 그간의 형사들은 뭔가 올 곧게 가는 힘이 있었다면, 이 친구는 반전도 있고, 속임수도 있고, 유연한 느낌이 있었다. 만약 마냥 무거운 형사였으면, 우리 영화 숨막혀서 못 봤을 거다.

이창희 감독하고 교감이 많았나 보다.
술 마시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감도 좋고, 자기 계산이 정확하다. 그 고집도 참 좋다.전 감독은 엿장수라고 생각한다. 엿가락 길이는 엿장수 마음인데, 그 가위질이 아주 정확하다.
사실 영화에서 염려를 했던 건 반복되는 구조가 많다는 거였다. 그리고 설명도 많이 필요했다. 그런데 그 타이밍이 기가 막혔다. 임팩트를 줘야할 부분이라던가, 장면 전환의 신브릿지도 너무 좋았다. 그런데 중요한 건 불필요한 장면을 찍지 않는다는 거였다.
컷이 타이트했다는 건 일찌감치 들었다. 제작사에서 정말 좋아할 감독이다. 필름 시절이었으면 더욱 예뻐했을 거다.
맞다. 필름 롤값만 해도 어마어마하니까. 하하. 김희애 선배님이 “더 찍자”고 해도 안 찍는다. 사실 그런 건 현장에서 찍은 뒤에 편집 과정에서 안 쓰면 될 일이다. 그런데 참 밉지 않게 거절한다. “선배님, 충분합니다”라고 말한다. 스릴러 장르는 계산이 중요하다. 그런데 그 계산이 정확했다. 정말 신인답지 않은 감독이다. 촬영본과 편집본의 차이가 거의 없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겁이 없을 수도 있다. 거장이라 불리는 잘 찍는 감독님들도 1, 2, 3, 4 순위를 정해놓고 촬영을 가니까, 신인 감독님의 패기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창희 감독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흐른다.
언론 시사 끝나고도 동네에서 소주 한 잔 했다. 제가 이 감독에게 “축하한다”고 했다. 영화가 잘 나왔다는 이야기였다. 그랬더니 “너무 떨린다”고 했다. 일단 1차적인 건 선배님한테 잘 찍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니 끝났단다. 그런데 이젠 흥행을 걱정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 완성도 있는 영화를 사람들이 많이 못 보게 된다면, 그건 영화계의 심각한 문제라고 본다.

상영 구조를 이야기하는 걸까? 분명 전작 ‘일급기밀’ 때도 관련 이야기가 많았다.
‘일급기밀’은 확실히 관객이 선택하기엔 정치적으로 무거운 주제이긴 했다. 하지만 사영시간도 분명 많은 문제가 있었다. 영화계 전반의 문제다. 그래서 이 감독도 흥행 걱정을 한 거다. ‘사라진 밤’의 경우 완성도가 높은데 배급놀이에 따라 없어진다면 우리 영화계의 문제를 그대로 드러내는 거라고 본다. 이런 영화가 흥행해야 영화 구조가 변할 거 같다.
하지만 모두가 흥행을 이야기하기에 영화계의 다양성이 줄어든 거다.
엄청난 흥행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나이 먹을수록 ‘영화는 관객이 얼마 드는 게 좋을까?’라는 생각을 자꾸 해본다. 적정관객수를 생각하지, 대박만 외치지는 않는다. 오히려 대박이 날 영화가 아닌데 관객이 많이 들면 관객에게 미안할 거 같다.
장르적으로 적당한 수준의 흥행 수치가 다 다르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할 정도의 관객이 들었으면 좋겠다. ‘사라진 밤’ 같은 장르 영화도, ‘리틀 포레스트’ 같은 슴슴한 영화도 꼭 필요한 영화다. 다른 나라 영화, 가까운 일본 영화만 봐도 여러 장르의 다양한 영화가 나온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쏠림 현상이 너무 심하다. ‘사라진 밤’ 같은 영화가 잘 돼야 큰 영화사들이 중간 버젯의 영화에도 참여할 거다. 더 이상 자본이 많이 들어간 짜내기식 영화가 늘어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다. 분명한 건 영화계 구조에 문제점이 있다는 거다. 모두가 노력해야 한다.
역시 데뷔 20년차 배우다. 보다 포괄적으로 시장을 바라보는 것 같다.
분명 젊었을 땐 못 했던 생각이다. 아무래도 책임감이 느는 것 같다. 제가 어딘가에 잘 나서 훌륭한 걸 할 수 있을까, 공론화 시키고 싶은 마음은 있다. 그렇다고 한 쪽에 쏠려서 무언가를 대변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문제제기를 할 사람은 있어야 한다. 나중엔 좋은 영화 프로그램 같은 걸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오랜 시간 연기를 하다보면 매너리즘도 올텐데.
전 아직도 어떤 운명적인 작품을 만날까 정말 궁금하다.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청춘 시절 “소개팅 할래?”라는 말을 듣는 것 같다. 텐션이 올라가면서 “어떤 애야? 성격은 어때?”라고 되묻고, 기분이 막 설렌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들어왔다는 건 그쪽에서 나를 찍어서 들어온 소개팅이라는 이야기다. 그때부턴 ‘제발 운명의 사람이기를’이라며 기도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소개팅이 좋은 걸까? 예쁜 사람? 돈 많은 사람? 아니면 뉴페이스?
뉴페이스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아무래도 안 해 봤던 장르나 캐릭터의 작품이 들어오면 기분이 좋다. 작품의 크기는 가리지 않는다. 사실 큰 영화 중에 매력 넘치는 영화를 보기도 힘들었던 것 같다. 제 쓰임새를 불러주는 곳은 항상 좋다. 꼭 소개팅이 자주 들어올 필요도 없다. 의미있는 자리이면 된다. 나를 의미롭게 만들어주는 소개팅, 그런 소개팅이 좋다.
사진=싸이더스, 씨네그루 키다리이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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